리뷰/책

적군파

자카르타 2016. 5. 17. 00:29




1971년 12월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연합해 '연합적군'이라는 새 조직을 결성했다. '총을 이용한 섬멸전'이란 기치에 공명한 이들은 바로 31명의 대원들을 모아 산속에 들어가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아사마 산장에 고립되어 경찰 천여 명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진압되었을 때, 이들이 거쳐온 은신처 주위에서 시신 12구가 발견되었다. 평균 연령 23.3세의 젊은 혁명가들은 왜 자신의 동료를 죽이게 되었을까? 


저자인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일본 전전 공산당원들의 전향을 연구하던 중에 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에 주목한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혁명군이 기획했지만 테러를 실행한 건 일본 적군파의 분파 소속 대원들이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고조의 심리, 재판 과정과 그 이후 사상의 변화 과정, 즉 전향 과정을 연구하려던 저자는 텔아비브 테러에 앞서 일본에서 벌어진 연합적군 숙청 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저자는 국가 체제가 개인에게 전향을 강요하던 억압을, 동지들 사이에서 사상의 순결을 강요하기 위해 행해졌던 '총괄 의식'에서 발견한다. 적군파의 리더이자 연합 후 연합적군의 리더가 된 모리는 동지들에게 철저한 공산주의화를 위해 자기 비판을 강요한다. 그 누구도 공산주의화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말의 폭력은 곧 육체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고문에 의한 죽음도 '총괄'에 철저하지 못한 탓에 비롯된 '패배사'로 규정하게 된다. 


마치 섬에 고립됐던 <파리대왕>의 아이들처럼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로 자신들의 혁명의 토대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이야기하거나, 모리와 같은 일부 지도자의 성격 결함을 들추지 않는다. 대신 저자는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같은 결과에 봉착했을 수밖에 없는 구조와 맥락을 짚어낸다. 


'전향'이 이데올로기라는 거푸집을 허물어 그 이데올로기로 타당성을 보장 받던 모든 행동의 실행의지를 무너뜨리는 거라면 연합적군은 반대로 실행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이데올로기의 거푸집을 만들면서 그 안에 동료 고문, 살해를 채워넣은 셈이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수직의 위계구조에서 한 인물에게 이데올로기를 정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할 수 없었던 구조가 바탕을 이룬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세상을 좋게 바꾸려했던 선한 의지를 품었던 이들이 스스로에게 괴물이 되었기 때문이고, 이런 일들이 비단 44년 전 일본의 어느 산속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추구할 비전이 없기에 그저 동료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학교와 군대가 그렇고. '모호한 인간'을 용납하지 않고 이념의 날카로운 선명성을 강요하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총괄'의 순결을 요구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다면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할 수는 없다고 하고, 여성주의를 지지한다면 중식이 밴드를 옹호할 여지는 없단다. 민주당과 국민의 당 사이에는 어떤 흐릿한 경계도 있을 수 없다는 듯이 한겨레 신문은 양쪽에서 십자 포화를 맞고, 하종강은 전교조의 적이 되어 버렸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도 '전향'의 문제가 나온다. 신부는 후미에를 거부한다. 후미에는 예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밟고 넘어가는 의식으로, 배도의 증거가 된다. 신부가 끝내 후미에를 거부하고 사형을 앞둔 어느 날 밤, 옥 엽에서 코를 고는 소리에 역정을 낸다. 그때 그는 그 소리가 코고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문을 받으며 죽어가는 신도들의 신음 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때 신부는 후미에를 받아들이고 비로소 신의 음성을 듣는다. '밟을 때에 네 발이 아플 것이니 그것으로 족하다' 


모호한 인간, 모자란 인간의 자리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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