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브라운 신부 시리즈 1 - 결백

자카르타 2016. 5. 30. 20:22




편견은 뻔뻔하다. 그 근거는 빈약하기 그지없으면서도 그 때문에 맹목적으로 지속된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 대한 내 평가도 그런 편견 중의 하나다. 얼마 전에 친구와 미스터리에 대해 얘기하다가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 대한 편견을 또 꺼내들었다. 내가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단순한 환원론 때문이었다. 가령 첫 권 <결백>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네 명의 감시자의 눈에 살인자가 걸러지지 않는데, 브라운 신부는 그 이유가 살인자가 우체부와 같이 일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럴 수는 있겠지만 또 항상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브라운 신부>에는 그런 장면들이 유난히 많다. '이상한 발걸음 소리'에서는 발걸음의 리듬을 계급의 기표로 단순하게 환원시킨다. 이 때문에 흩어진 증거로 유추한 사건의 진상은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모호하고 작위적이다. 이게 이번에 다시 읽기 전까지 이 시리즈에 갖고 있던 생각이다. 


읽은 지 10년이 지났고,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 세세히 기억도 못하면서 성토용으로 내뱉는 멘트만은 번번히 울궈먹는 중이다. 문득 얼마 전 소설로 읽고 영화로 봤던 <악의 교전>이 떠올랐다. 분명 마지막 하이라이트에서 학생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결백>의 오마주다. <결백>의 열한 번째 에피소드 '부러진 검의 의미'는 자신의 부정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휘하 연대를 사지로 몬 장군에 대한 이야기다. 돼지 눈에 진주란 이런 걸 보고 하는 얘길까? 뻔하고 식상한 이야기라며 폄하했던 이야기 속에서 어떤 작가는 심장이 쫄깃해질만한 이야기의 원형을 발견해 낸다. 과연 내가 못 보고 지나간 것은 뭘까, 이 편견은 유효한지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겸손은 거인의 어머니다. 낮은 골짜기에 있는 이들은 거대한 것을 보지만,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이들은 작은 것만 본다.' 

책의 한 구절인 이 이야기가 맞다. 분명 미스터리의 태동기에 쓰인 작품인만큼 플롯이나 트릭에서 어설픈 것이 보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그런 것을 뛰어넘는 곳에 있었다. (역자 후기에서도 체스터 턴은 포우의 마술 같은 기교와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주된 정서를 이끄는 이미지는 황혼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건이 황혼녘에 벌어진다. 그 황혼은 낯익은 범죄자의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날아다니는 별들'), 눈 앞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져도 이를 감춰주기도 한다('잘못된 모양') 그러나 황혼의 가장 큰 기능은 낮과 밤의 경계를 만들듯이 이성과 과학, 과학과 종교, 선과 악의 경계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 경계에서 브라운 신부는 그 모호함 자체를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인다. 


그 모호함 속에서 만들어낸 결론이 여전히 내게는, 근래의 치밀한 미스터리에 익숙한 내게는 여전히 성기게 보이지만, 그 모호한 인간에 대한 일체의 판단을 중지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가는 모습은, 기시 유스케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작가에게도 영감을 주었을 것 같다. 파장한 장터를 뒤지는 심정으로 몇 구절 적어본다. 



20. 

범죄자가 창조적인 예술가라면, 탐정은 비평가에 지나지 않지. 


39. 

아닐세. 이성은 심지어 최후의 지옥의 변방에서나, 만물의 소실점에서도 항상 '이성적'이라네. ... 하느님께서 이성에 의해 구속되심을 인정하는 곳도 교회뿐이라네. 


40.

물리적으로만 무한한 게지. 진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어떻게 무한하다 말할 수 있겠나. 


48. 

자네, 이성을 공격했지 않나. 신학을 하는 사람에게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지. 


98. 

만일 런던에 키가 180센티미터 미만인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일류 호텔이 있다면, 180센티미터가 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사교 클럽을 만들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호텔에서 저녁 만찬을 즐길 것이다. 


128. 

지옥과 같은 고통스런 작업에서 탄생하는 것이 예술작품만은 아니니까요. 범죄도 그 일부입니다. 


129. 

범죄는 단순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신비화되는 것이니까요. 


145. 

사회주의자는 굴뚝 청소부들이 굴뚝 청소를 하면,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죠. 


164.

인간은 선한 일에 있어서는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네만, 나쁜 일에는 그 수준을 유지할 수가 없다네. 점점 더 내리막길을 향해 내달릴 뿐이지. 


201. 

사람들은 질문한 사람이 의미하는 것 혹은 그들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한다네. ... 이것이 언어가 쓰이는 방식일세. 


237. 

현대인들은 항상 두 가지 서로 다른 생각을 혼돈하곤 하지. 다시말해서, 놀라운 일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로운 것과, 복잡하다는 의미에서 신비로운 것의 완전히 다른 두 가지를 섞어서 생각한다는 말일세. 


267. 

모든 순수 종교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네. 바로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 따라서 악마 숭배도 마찬가지로 순수한 종교 중 하나라네. 


272

잠은 성찬식일세. 왜냐하면, 잠을 자는 것은 신념의 행위일 뿐 아니라 식량이기 때문이지. 


290

요정의 나라에서는 반드시 좋은 일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닐세. 


331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전통을 간직하는 법이다. 귀족들은 전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유행으로 살아간다. 


361

중세 시대의 건축에는 거인과 같은 에너지가 있어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마치 격노한 말의 강한 등을 타고 보는 것처럼 항상 돌진하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363

겸손은 거인의 어머니입니다.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은 거대한 것을 봅니다. 하지만,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작은 것들을 볼 뿐이지요. 


373

... 그 단 하나인 영혼의 질병은 뭡니까? / 자신의 영혼이 아주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거라네. 


421

광기와 절망은 충분히 순수한 것이지. 


435

모든 이들의 성서를 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이해하게 될지 답답하구면. 


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것을 찬양하는 정직한 사람을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나? 


436

범죄에서 진정한 문제가 되는 것은 점점 더 거칠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비열해진다는 것일세. 


437

그에게는 부가 가져오는 명성이 그 부 그 자체만큼이나 기분 좋은 것이었단 말일세. 


453

도대체 누가 남들 앞에서 즐거운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의 피에 손을 담그겠느냐는 겁니다. 이건 마치 산타클로스를 살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456

사람들은 웃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내내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유머 없는 쾌활함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것이지요. 


478

가장 치명적인 실수조차도 죄악과는 달라서 인생을 해치지는 않는다오.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파일러  (0) 2016.06.09
심리 부검  (0) 2016.06.06
동사의 맛  (0) 2016.05.24
적군파  (0) 2016.05.17
미스터리의 계보  (0) 2016.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