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그린북

자카르타 2019. 4. 1. 22:28




연세 지긋한 분들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본인의 정치색을 드러내곤 한다. 지난주에도 상인회 회장님이 별 이유없이 소통방에 들어오시더니 요즘 청년들의 교육 문제부터 꺼내기 시작하셨다. 좌경화 교육을 받아서 미국에 은혜도 모르고 적대시한다는 것이 요지. 여기까지는 뭐 그럭저럭 들어드릴만 했는데 여수, 순천, 4.3까지 이어지자 한마디 했다. ‘저희 아버지가 1919년 생이신데, 들어보니 또 다르더라고요. 국방군이나 인민군이나 똑같이 민간인 살상하고….’ 길게 갈 것도 없이 이쯤 꺼내놓으면 요 녀석 아니다 싶으신지 이야기를 접고 나가신다. 

‘맨 프럼 어스’의 인상적인 장면. 기원전부터 살아왔다는 주인공에게 친구들이 시험삼아 묻는다. 시대별로, 지역별로 어땠는지? 그러나 주인공은 대답하지 못한다. 어느 때에나 그는 한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시대를 살아도 경험은 늘 한정적이고 전해주는 매체에 따라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있었어도 그 경험은 주관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축적된 정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분들이 꽤 많다. 

길게 돌아왔는데 이 얘기를 꺼낸 건 경험이 생각보다 사람을 바꾸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문이다. 과연 토니의 변화를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만약에 그가 골수의 인종차별주의자였다면 그 경험을 통해 바뀔 수 있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첫부분에서 토니는 흑인 배관공이 쓴 유리잔을 쓰레기통에 버리기까지 하는데, 영화에서는 이를 통해 흑인에 대한 토니의 태도를 단정짓게 한다. 하지만 토니가 떠날까 불안해하는 돈 셜리에게 ‘나도 예술인들을 이해한다’라고 하는 걸 보면 처음의 단정이 너무 섣부르지 않았나 싶다. 

결국 토니의 변화는, 더 나아가 사람의 변화는 내면에 이미 짜여진 코드를 건드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토니는 그런 인식의 변화를 수용할만한 사람이었다는 거지. ‘내가 너보다 더 흑인 같다’는 것은 딱 그의 한계다. 어쨌든 동질성에 의해서만 함께 할 수 있다는.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감명 깊은 것은 우리 주위에 ‘완고한 토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탈리안에게 반쯤 흑인이라고 했을 때, 어디 우리를 흑인에게 비교하냐며 흑인을 더 미워할 사람들 말이다. 어딜 봐서 내가 노동자냐? 나보고 이 나이에 전세를 살란 말이냐? 최근에 나온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고 보면 낯설어서 께름칙해하고 두려워하는 이보다 친한척 하면서 구분짓는 이들이 더 나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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