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굳이 세월호여야 했나라는 질문은 불충분하다. 세월호로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었는지를 되짚어 봐야지. 그게 온전히 구현되었는지를 따져봐야지. 아마 작가의 주제는 ‘이런 것들도 어른이라고’ 일갈하던 여주의 대사에 압축된 듯싶다. 이 대사로 영화는 기성세대에게 이 세태에 대한 책임을 각성하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 ‘세태’는 세월호 사건을 낳았고, 대기업 비리와 폭력을 낳는 모태가 된다.
여주는 꾸짓는다. 불의하고, 또 그것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어른들을. 그가 몸을 던진 것은 그 불의에 대항하는 마지막이자 가장 확고한 수단이자, 몸서리쳐지도록 혐오스러운 어른의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강력한 외침에 남주는 소스라치게 각성하고 이제까지의 궤적을 틀어 스스로 파국을 자초하면서까지 정의를 되찾으려고 한다.
‘쪽팔리지 않은 어른(남자)이 되자’는 워낙 이정범 감독의 작품 속에서 줄기차게 반복되는 거라 그의 스타일이라 치자. 그 스타일이 십대 여성 청소년에게 전이되는 것, 그래서 여주가 마지막 순간에 호명하는 것이 왜 ‘어른’인지에 대해서도 앞서처럼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관객의 납득의 여부를 떠나서.
그럼에도 가장 개운치 않은 것은 마지막 장면 여주의 웃음이다. 남주의 정처 없는 폭력은 여주를 만족시켰을까? 내 보기엔 마치 한 놈만 걸려라, 하고 벼르던 차에 마침 걸린 놈을 흠씬 두들겨 패는 느낌이다. 마침 걸린 놈이 아주 못된 놈이라 그나마 다행인데 그럼에도 벼르고 벼르던 이가 바로 작가인 것 같기 때문에 헛헛하다.
모든 영화가 실제 벌어진 사건 자체의 진실을 캐고, 갈등을 조명하기는 어렵고 또 그럴 필요는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체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인식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과 대기업 비리의 구조적 유사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복수는 결코 여주가 얘기한 ‘어른’의 복수에는 가닿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 환상 속의 여주가 웃는 모습이 공감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