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 달러 베이비>
슬플 것 같은 영화는 보지 않던 때가 있었다. 영화가 그런 건지, 내가 좀 변한 건지. 이제 보니 그다지 슬프지 않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의 정치 성향을 보면 자살이든 안락사든 절대 반대할 것 같은데 외려 이런 문제들만 골라 건드리고 있어 흥미롭다.
사회 규범과 최선을 추구하는 자유의지 사이의 간극을 이야기로 메우려고 하는 걸까? 그의 선택지들은 늘 자유로우면서도 자신이 지키려던 가치를 허문 뒤의 일이라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오히려 극중 인물이 허문 사회 규범의 가치는 실제로는 절대로 허물어지는 법이 없지만, 늘 한 가지를 덧붙인다. 마치 예수처럼. '안식일이 인자의 주인이 아니라,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프랭키가 신부에게 던지는 신학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이나 딸에게 매주 편지를 보낸다는 그의 말이나 모두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말이 실천으로 수렴되기 때문이겠다. 반송된 편지가 쌓여갔던 것처럼, 실없는 농담 또는 신부를 괴롭히기 위한 장난처럼 보였던 질문들은 영화 말미 프랭키의 선택과 겹치면서 신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바뀐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끝까지 신의 아들의 지위를 놓지 않았던 예수의 외침보다는 신은 왜 하필 하찮은 인간사에 간섭하느냐 물었던 욥의 외침에 더 가깝다. 부조리한 섭리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고작 이 정도이지 않냐고. 미숙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왜 권투를 boxing이라고 하는지 정확한 기원은 모르겠다. 맘껏 상상하자면 이 세상을 10평 사각형에 말아 넣었기 때문은 아닐까? 얌전하게 포장된 세상. 그래서 그 안의 폭력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면에서 영화는 또 다른 boxing이다. 그 링 위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매번 사력을 다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