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 (2012)
Seeking Justice
7.4
글쓴이 평점
첼로를 연주하는 아내 로라가 어느날 밤 무참히 폭행을 당한다. 그러나 남편 윌은 속수무책이다. 눈앞에 놓인 폭력의 상처에 비해 법은 너무나 멀리 있다. 그런 그에게 사이먼이 다가와 속삭인다. 자신이 대신 복수를 해주겠노라고. 그 대가는 단지 한 번의 '배달 심부름'을 해주면 된다고. 망설이던 윌은 그에 응하고 그는 또 다른 불의의 덫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하면 '정의 justice'란 어떤 행위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그런 면에서 너무나 분명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가령 몇 십만 원을 훔친 중국집 배달원이 실형을 사는 것에 비해 재벌 총수의 수백억 횡령은 '경제 침체를 우려'하거나 '그 간의 사회 공헌을 참작하여' 아주 가벼운 형으로 갈음하고 만다면, 아리스토틀의 기준에 따르자면 불의도 이런 불의가 없는 셈이다. 이번 저축은행 사건이나 SK회장 건도 두고 볼 일이다. 미래저축은행의 경우, 그가 '내추럴 본 주류'가 아닌 걸 생각하면 이번에는 좀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할 지도 모르지만, SK의 경우는 여전할 것이다.
하여튼 영화는 이런 불의한 상황으로 시작한다. 물론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앞서 언급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경우는 아니다. 영화는 그런 계급에서 비롯된 갈등보다는 오히려 중산층의 까탈스런 시선을 반영한다. 만연한 폭력을 어떤 사회 문제의 증후로 보기보다는 여전히 처리되지 못한 문제, 마치 제때에 처리되지 못한 도심의 쓰레기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관객들에게도 쉽게 공감을 얻어낸다. 하긴 주먹질로 한쪽 눈이 감긴 여자의 얼굴을 보고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마는 이 영화가 아쉬운 것이 바로 그 폭력이란 증후 내면에 사회가 품고 있는 신경증을 건드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익히 예상이 가능하듯이 주인공은 복수에 대한 섣부른 충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느라 애를 먹는다. 그저 애를 먹을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위태하게 된다. 사이먼은 복수를 대행해준 값으로 윌에게 다른 심부름을 요구하고, 그 와중에 윌은 살인 혐의를 쓰게 된다. 윌이 사사로운 복수를 용인했다가 다시 사회제도의 틀 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이렇게 윌 스스로 또 다른 범죄에 노출되게 되면서다. 목적이 수단을 정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원칙을 체감하면서 윌은 돌연 도시에 암암리에 만연한 '자경단'의 존재를 파헤치려고 한다.
영화는 그렇게 '제도'가 설정한 금 안에서의 '정의'를 주장하고 있다. 목적이 수단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제도의 가이드라인을 다시 확인하고 마는 수준이다. 이것은 애초에 윌이 북받친 감정에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일이다. 관객들은 윌의 오판을 그저 지켜봐야할 뿐이고, 그 이후에 그가 처한 상황을 짜증스럽지만 따라가야하는 처지가 된다. 영화의 원제처럼 '정의의 추구'는 사회 합의에 기초한 '제도'에 기대서 보면 실은 너무나 명쾌한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처럼 악역이 되고 마는 사이먼은 과대 망상 환자 혹은 정신 병자가 되고, 응징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다른 상상을 해 본다. 이 영화가 폭력이 병든 사회의 증후라는 데에 초점을 두고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것이 동어반복일 뿐, 사회에 대한 치유는 절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표현해 냈더라면 어땠을까? 좀 더 묵직한 묵시록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건 배트맨 타크 나이트에서만 기대를 할 수 있는 거였을까? 아무튼 그런 저런 이유로 딱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도, 공감이 가지도 않는, 그저 소재로서만, 역시 복수와 정의의 경계에 대한 얘기들이 갖는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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