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소년H

자카르타 2013. 1. 27. 22:26


소년 H. 1

저자
세노오 갓파 지음
출판사
페이퍼로드 | 2009-08-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순수한 소년의 이야기!현대 일본을 대표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소년 H. 2

저자
세노오 갓파 지음
출판사
페이퍼로드 | 2009-08-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순수한 소년의 이야기!현대 일본을 대표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소년H>를 읽는 내내 어릴 때 살던 광장동이 떠올랐다. 그때 광장동은 행정구역만 서울이었지 인접한 경기도 교문리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곳곳에 논과 밭이 있었고 산 아래에는 무당집이 그리고 그 앞 나무에는 삼색 천이 달려 있었다. 성황당 나무는 화보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무속이 갖는 일말의 정감은 전혀 없었다. 그 나무 아래 가로등이 달린 탓인지 가로등의 역광을 받은 나무는 딱 전설의 고향에 나올만한 비주얼을 하고 있었다. 딱 성황당과 가로등의 부조화가 그 때 서울 변두리의 정체성이었던 것 같다. 


<소년H>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말, 40년대 초 일본의 고베도 그랬나보다. 천황을 신처럼 모시는 신정사상과 이제 물오르기 시작한 현대 문명을 발판삼아 벌인 태평양전쟁의 전운과 그 보다 더 깊이 사람들의 마음을 억누르는 군국주의. 그러나 한편으로는 항구도시라 다양한 인종과 대규모 산업시설을 끼고 사는 대도시로서의 개방성. 이 이상한 부조화 속에서 자신의 시선을 얻어가는 소년H의 이야기가 짐짓 무협소설처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하면서 저자인 세노오 갓파는 일본을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무대미술가, 수필가라고 한다.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줌싸개 병을 고치려고 부황을 맞고서는 그 상으로 계란 덮밥을 얻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답례로 메뉴를 그려주는 대목에서 문득 세노오 갓파의 일러스트가 궁금해 찾아봤다. 아래는 그 그림이다. 

  




세노오 갓파는 이런 식으로 대상과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부감도로 유명한 듯 하다. 

이 소설 <소년H>도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모습을 마치 미니어쳐를 보고 그리는 화가처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날 밤 끌려가서 생사를 모르는 공산주의자, 징병에 끌려가서 자살로 마감하는 동성애자, 군국주의에 경도된 어린 학생들, 미영을 적국으로 둔 상황에서의 일본 기독교인들과 이를 대하는 주민들, 마치 내 어릴 적 학교를 고스란히 그려놓은 것 같은 당시 일본 중학교의 모습들이 결코 비아냥이나 비애감, 우월한 의식 없이 진솔하게 그려낸다. 


읽는 동안 수시로 감탄을 하고 놀라게 된다. 

70년 전의 일을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해 내는 작가의 총기도 대단하고, 또 내 어릴 적 학교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어쩌면 이토록 우리는 군국주의 일본의 식민 잔재를 붙들고 살았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소년H의 시선이 읽어내는 시대의 진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개인의 가치에 기반한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뒤로는 주로 소년H가 보는 시선에 담긴 일본과 신문이 묘사하는 일본 사이의 간극이 종종 소개된다. 패전 후 소년H의 심리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가면 놀이라도 하는 듯이 군국주의의 구호로 눈에 쌍심지를 돋웠던 사람들이 갑자기 민주주의의 전도사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 변화에 대한 어떤 반성도 평가도 없이 흘러가는 모습에 소년H는 혼란을 느끼고 자살을 감행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 이번 선거에서 승패를 떠나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 48%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서 과연 또 민주주의의 가치를 내면화한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그 진보 진영(?) 속에는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안락사에 대한 의견은 또 어떻게 나뉠까? 이런 문제들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개인의 존엄'에 대한 사회 차원의 합의 없이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대 이후로는 '피해자'로서, 그리고 민주화 당시에도 '희생자'나 '투사'인 이미지만으로 동류 의식을 이루어 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이 있다면 수구의 몰상식, 권위의 부조리 뿐만이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진영 내의 이런 논의의 부재가 또 한 몫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를 읽고난 뒤 이렇게 당당하게 한 시대를 고민하고 멋있게 늙은 노인을 만나게 된 게 기뻤다. 자기 시대를 냉정하게 평가하되 그 시대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여는 사람. 그런 노인을 만난다는 것은, 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있겠지?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못견딜 정도가 됐다. 세노오 갓파를 찾아보니 위 일러스트와 함께 아래 사진도 찾았다. <소년H>가 출간된 뒤에 교과서에도 실리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니 그 촬영 당시 캐스팅된 배우들과 찍은 사진인 듯 싶다. 제일 왼쪽 의자에 앉은 분이 세노오 갓파다. 이 사람의 이 책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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