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Masquerade
8.6
(스포일러 잔뜩입니다.)
이야기는 변화다. 정확히는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서 변화된 가치를 드러내면서 이 전위차로 감동을 준다.
광해에서는 무엇이 변했을까? 주인공인 하선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그의 궁중 생활 - 그가 겪어보지 못한 그리고 관객들도 겪어보지 못한 그 호화롭고 사치한 체험을 한다는 걸 우선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건 변화라 할 수 없다. 이 체험이 하선의 본래 캐릭터를 바꿔놓은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선이 경험하는 변화로 꼽을 수 있는 다른 하나는 그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여러 정책들에 대한 주장을 과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펼쳤다는 점 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변화라 하기에는 그리 탐탁치 않다. 뭔가 이전에 하선이 가졌던 주의, 주장, 행동과 다른 뭔가에 대한 내면의 충동, 갈등을 거치고 결단을 통해 새로운 시선과 행동을 쟁취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 오히려 하선이란 인물이 원래 그런 성정과 심지를 가졌다고 보는게, 그 캐릭터를 일관되게 끌어나갔다고 보는 게 맞을 듯 싶다.
이 영화에서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 것은 실은 주변인물이다.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상선과 도부장, 허균, 중전이 하선에 대해 보인 태도의 변화가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변화요 감동의 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감동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하는 것은 그 실체가 허상이지 않은가하는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먼저 마음을 여는 상선의 호의의 근거는 뭘까? 첫 등장에서 하선을 감시하는 감시자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마지막 하선의 도주를 주장하게 되는 사이에 상선이 겪은 것은, 하선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짐작컨데 하선이 기미상궁과 나인들에게 보인 호의와 대동법에 대한 관심, 그리고 자신에 대한 연민을 보이는 장면에서 하선에 대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한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어떻게 천민인 하선의 마음씀에 직급으로 치면 당상관인 상선이 그토록 감읍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하선의 권위가 거짓이며 그 권위의 자비 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그저 하선 그 본연의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 하선의 행동에 감동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싱겁게 하선에 공감, 감동하는 상선의 시선엔 천한 광대의 자비가 아닌 왕의 자비로 보는 시선이 뒤섞여 있다. 결국 상선은 하선의 정체를 모르는 도부장이나 중전의 시선을 몰개성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도부장과 중전이 하선에 대해 공감하고 감동하는 축은 근거가 있을까? 중전의 경우 왕과 아주 사사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왕의 태도 변화에 가장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정략에 따른 판단을 우선하는 광해와는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오라비를 구해주고 또 사가의 부부의 정을 드러내는 하선에게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감동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물론 여기에서 그렇게 무딜 수 있을까, 싶은 리얼리티의 태클을 걸 수도 있지만 그건 그저 설정의 차이라고 해 두자.
그에 비해서 도부장의 경우 그의 감동은 이해하기가 좀처럼 힘들다. 그가 경험한 왕의 은혜라는 것이 결국은 도부장이 가졌던 정당한 의심을 희생해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하선의 대사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말에서 도부장이 어떤 위안과 감동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감동은 그 말한 사람이 왕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선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 도부장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희생을 하게끔 할 어떤 단서도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가장 일관되게 행동하고 본이 캐릭터에 적정성을 보인 인물은 허균이다. 그가 보인 반응의 적정성은 그가 별로 행동과 판단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강하고 의로운 왕을 만나고 그를 섬기고자 하는 유혹에 잠시 끌리지만 그것 역시 타당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적절한 개연성을 훼손하는 것은 플롯의 트릭이다. 마치 하선이 용상에 앉기를 고집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시간 배열과 편집은 오히려 긴장이 사라진 뒤에 당시 하선의 갈등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결국 임금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은 하선의 것이 아니라 혀균에 의해서 정확히는 감독과 편집자에 의해서 느닷없이 부여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낱낱이 뒤집어 보면 감동할 꺼리가 이렇게 희박한데도 관객들은 어디에서 그렇게 이 영화에 열광을 했던 것일까?
일정부분은 이 영화가 의도한 아우라 - 즉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몇가지 에피소드들로 연출된 아우라 탓이기도 하겠고, 상당부분은 - 이것이 연출에 의해서 의도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 영화에서 하선을 제외한 모든 출연진들이 오직 관객과 감독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광대인 하선이 현실의 역학을 뒤집어 버리는 데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만 쪽쪽 뽑아 달여서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선이나 중전, 도부장, 허균은 각기 다른 역할인 듯 하지만 그 전복을 위태하게 바라보다 성취의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관객의 시점샷들을 제공하는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간단히 얘기하면 하선은 임금의 옷을 입고 평소 하던 대로 품은대로 행동을 했고, 그 주위 사람들은 발방귀에 춤을 춘 셈이고,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감동을 준 것은 현실에 대한 해학, 풍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호응은 영화 자체보다도 이 영화를 둘러싼 이 즈음의 풍경과 연계해서 봐야할 것만 같다. 혹 그런 상상도 해본다. 하선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의 층위, 행동을 다르게 디자인 했더라면 또 어땠을까? 그것이 현실에서 이런 꿈이 수용되지 못하고 파괴되는 각성을 더 불어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시퀀스 분석
시퀀스 #1. (~08:08)
구중궁궐에 갇힌 임금 광해. 자기만의 세상인 것 같은 궁궐은 광해에게 오히려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태한 감옥이다.
임금은 그의 측근 허균을 통해 자신을 닮은 사람을 구해 방패막이를 삼으라 지시를 한다.
정무 또한 임금을 옭죈다. 중전의 오라비 윤정호를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고변이 잇다르고 있어 임금은 한층 궁지에 몰린다.
시퀀스 #2. (~19:26)
홍루몽에서 연희를 맡은 만담꾼 하선은 왕과 닮은 외모를 이용해 왕을 풍자한 만담으로 벌어먹고 산다.
허균은 하선을 데리고 궁궐로 들어가고 임금의 낙점을 받아 하선에게 임금의 대역을 시킨다.
임무 첫날 하선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가를 하고, 임금은 그 시간 내연의 여자 안상궁의 안가에서 휴식을 취한다.
시퀀스 #3. (~28:52)
하선은 누군가의 고변으로 사또에게 잡혀 왕을 희롱한 죄로 곤장을 맞고, 그 대가로 홍루몽의 15세 기생을 바친다.
허균은 임금에게 유종호의 무죄를 아뢰지만 임금은 이를 알면서도 정략 때문에 넘겨주려한다.
마침 임금이 약물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자 허균은 하선을 데려다 임시 임금 노릇을 하게 한다.
시퀀스 #4. (~45:24)
하선의 궁중생활이 시작된다. 사흘 동안은 병을 핑계로 중전을 따돌리기도 하고, 신하들도 보지 않게 되지만,
똥누고 밥먹는 일 모두가 하선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더 이상 정무를 미룰 수 없게 되자 허균의 감독하에 하선은 정무를 보게 된다.
상찬(?)이 있는 첫날. 하선은 대동법과 호패법 시행을 지시하고 유정호의 면책을 지시하여 서인들의 반발을 사게된다.
시퀀스 #5. (~1:00:32)
하선은 기미나인이 올린 팥죽으로 나인들과 친해지고 나인들의 호감을 얻는다.
한편 길상사로 피신한 임금의 중독 원인이 밝혀지고, 임금의 행적이 이상한 것을 눈치챈 서인들은 안 상궁을 제거한다.
서인들은 임금을 기만하는 상서를 올려 하선으로 하여금 억지로 결재하게 하고 이때문에 하선은 현안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게 된다.
임금이 허균과 친밀하게 보내는 것을 본 서인들은 허균을 밀착 감시하기로 한다.
하선은 기미나인의 사연을 듣고 대동법 시행을 강하게 주장한다.
시퀀스 #6. (~1:11:21)
하선의 독단에 허균이 하선을 질책하는 과정에서 유종호가 중전의 오라비인 것을 알게 된다.
중전은 자신의 오라비를 살려달라며 은장도를 뽑고, 하선은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유종호를 살려주겠노라 약속한다.
추국장에서 하선은 위관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유종호를 살리라 지시한다. 이때문에 서인의 영수인 이판의 분노를 산다.
유종호를 살린 하선은 중전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중궁전으로 향하고 거기서 중전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이 자리에서 도부장은 하선이 가짜라는 것을 의심한다.
시퀀스 #7. (~1:23:56)
도부장이 하선을 의심하는 가운데 하선은 기미나인을 시켜 중전에 팥죽 배달을 시킨다.
하선의 독단에 허균이 질책을 하지만 궁중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한 하선은 허균을 가지고 장난을 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따로 만나자는 중전의 연락이 오고 하선은 중전을 만나러 나간다. 그 자리에서 도부장은 하선이 가짜라는 의심을 하고,
급기야 하선의 목에 칼을 겨눈다. 위기를 모면케 하는 것은 중전. 하선은 도리어 도부장에게 사면과 은전을 내려서 도부장의 마음을 얻는다.
시퀀스 #8. (~1:31:16)
진짜 임금은 위중한 상태에서 깨어나고 반전을 꾀하는 한편 자신의 대역 노릇을 했던 하선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중전을 폐위시키라는 유생들과 중신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하선은 중전을 끝까지 지켜줄 것을 맹세한다.
시퀀스 #9. (~1:41:03)
이판 세력도 임금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채고. 궁궐 안에서도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중전이 직접 확인에 나선다.
임금과 동침하러 강녕전에 들어온 중전은 하선의 옷을 벗겨 몸에 난 상처를 확인한다. 상처가 없는 것을 보고 중전은 하선에게 도망치라 조언한다. 하선은 기미나인에게 자신이 받을 돈을 건네주는데, 기미나인은 상궁으로부터 왕을 독살하라며 독약을 건네 받는다.
시퀀스 #10. (~1:50:31)
허균의 지시대로 마지막날을 보내는 하선. 하선은 대신들이 주장하는 대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절차를 진행하다가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금나라에 외교문서를 전달할 것을 주장한다. 식사시간. 기미나인이 기미를 본 뒤에 피를 토하고 죽자 하선은 상궁에게서 사주한 자를 자백받고 이를 추국한다. 하선이 강수를 두자 이판 세력은 무신들을 모아 임금이 가짜라며 선동한다.
시퀀스 #11. (~2:00:11)
허균은 하선에게 임금이 되겠느냐고 묻고 하선은 임금이 되고 싶다고 한다. 반면 하선을 섬겼던 상선은 하선에게 도망치라 권한다.
자객들은 길상사의 임금을 노리고 쳐들어가고, 군사들은 하선을 잡으러 궁궐로 진격한다.
군사들에게 끌려나온 임금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 가슴을 풀어해치는데 용상에 앉아 있던 것은 바로 진짜 임금이다.
허균이 임금이 되겠느냐 물었을 때 하선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얻는 자리는 싫다며 거절한 탓이다.
이로서 이판 세력들은 일거에 패퇴한다.
시퀀스 #12. (~끝)
도부장은 하선을 보내고 왕명을 받고 추적한 이들을 홀로 상대하다 결국 죽는다.
하선은 배를 타고 멀리 떠나고 이를 홀로 허균이 나루터에서 배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