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별로 쓸 게 없을 때는 쓰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작정한 것도 있고해서 꾸역꾸역 써본다.
이 영화는 벌써 몇 달 전에 봐서 지금은 기억이 가물하다. 이런 걸 보면 뭔가를 읽고 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꼼꼼하게 적어놓지 않으면, 아니 적어놔도 시간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여름에 단상을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아래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써 놨다.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가 인도에서 만난 그의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다.
열심히 기도에 정진하려고 인도를 찾았지만 막상 엘리자베스를 기도를 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그가 뉴욕에서 고뇌에 차 몸부림치면서 했던 기도가 '기도하게 해달라'는 기도였을까? 이탈리아에서 맘껏 먹고 수다를 떨었지만 아직 신과의 대화는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침 어린 나이에 부모의 강권으로 시집을 가게 된 친구가 불안해 하고 엘리자베스는 이 친구를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다짐한다. 결혼식날 신부는 즐거운 표정이다. 예식 중간에 하객의 선물을 모아놓은 방에 들어가 엘리자베스는 친구에게 위해서 기도했노라 고백한다. 기도를 못하는 엘리자베스는 이 친구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걸 상상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도였던 셈이다. 이 일 후에 엘리자베스는 그의 전 남편과 춤을 추는 상상을 혹은 환영을 본다. 나는 아마 그것이 엘리자베스가 그의 남편에 대한 마음의 짐을 풀어놓는, 그래서 평안을 얻는 때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이 장면에 인상이 깊었던 것은 아마도 평소 내가 가진 생각과 비슷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친구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보면서 나에겐 저런 결혼식을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이, 의지가 없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을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기도라는 것. 그건 전권자에게 드리는 읍소가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한 청사진이거나 의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게 굳이 신을 배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나오는 대사지만 내가 복권을 사지 않는데 신이라고 복권에 당첨시켜줄 리가 있을까? (아, 쓰다보니 이렇게 기억이 나기도 하네)
이 영화의 모든 부분에 공감을 하는 건 아니다. 이 영화가 아니라 여자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겠지만, 엘리자베스가 먼 여행을 떠나 결국에 만난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어쩌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누구였든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저 짐작하는 정도다. 또 어느 정도 이 영화가 뉴욕이라는 도시의 특정한 계층의 감수성과 소비력에 소구하는 잘 기획된 상품이라는 의심도 있다. 특히 동양권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이르면 '뭐 저렇게까지!' 하는 반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는 내 나이 또래 남자의 감성과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할 때에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