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작가들의 잘 숙성된 와인 같은 창작론은 있어도 매뉴얼 같은 서사 이론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하지만 진화 심리학이나 인지과학 등이 발달하고있는 세상에서 서사 이론을 다른 학문과 접합해서라도 논리 정연하고 체계 있게 구축하려는 시도가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큼 서사라는 영역이 쉬워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창작을 하는 작가들 외에는 미지의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요즘 서사 이론에 대해서 조금씩 찾아보려고 하던 차에 반가운 제목을 만나서 덥석 사 읽은 책이다. 신화, 대화, 진화, 동화, 혼화, 만화, 영화 이렇게 일곱 가지의 이야기에 대해서 시론을 펼치고 있다.
각 소재의 이름을 '화' 각운에 맞춘 데서도 보이듯이 각각의 설명의 깊이에 얼마간 차이가 있고, 또 무리수도 엿보인다.
가장 만족한 부분은 신화에 대한 부분들이다. 650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지금은 앞부분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개연성과 합리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보편의 진리를 담보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대화' 장은 플라톤의 저작들이 주로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는 데에서 나온 이름이다. 저작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가 재판장으로 향하는 부분부터 재판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의 서사의 구조로 파악하면서 그 안에서 존재론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여기까지는 내가 모르는 분야라 그런지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전개되면서 철학과 서사의 구조의 차이를 굵직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과연 본래 취지에 맞는 것인지 석연찮은 구석이 적지 않다.
'진화' 장은 다윈의 진화론을 소개하면서 자연에 시간성을 부여하고 기존의 보편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신관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그가 택한 서술의 방식들을 탐구한다. 그 방식이 은유와 유비 등 기존 서사의 서술 방식을 차용했다고는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 저작 분석이 아니라 '진화'가 어떻게 서사의 측면을 갖는지에 대해 궁금했던 독자들의 기대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주제인 셈이다. 에필로그에서도 이 부분은 가장 뒤늦게 추가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사이 출간된 <진화의 플롯>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도 <진화의 플롯>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그 책이 주장하던 것과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 이어진 장으로 갈수록 서사 이론인 시론을 전개하겠다는 저자의 목적과 점점 간극이 벌어지는 것 같다. 다른 문학 이론이나 창작 이론에서도 느끼는 거지만 개별 작품으로 어떤 부문 예술 전체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삐걱거리기 마련인 것 같다. <미운 오리 새끼>와 <마당을 나온 암탉>을 비교 분석하면서 동화의 공통 요소가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를 소개하는데, 이들 세계를 그리는 것이 동화 일반의 주제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이렇게 개별 작품 분석으로 그 예술을 논하는 방식은 이후에 쭉 이어진다. 애니메이션을 혼화라고 하고, 애니메이션이 셀 제작 중심인 반면 영화는 샷 제작 중심이라고 구분 짓는 것도 억지스럽다.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대립과 병치를 혼화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도, 충분히 영화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지 않을까? 또 만화 장에서 장편 만화를 에픽(서사시)로 카툰을 아포리즘으로 나누는 것도, 뭐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런 구분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영화 장에 이르면 시간의 비가역성이 영화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등 모든 이야기의 특징이 아닌지.
후반에 여러 예술 양식들을 다루면서 작품 분석을 지나치게 확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저자의 의도대로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의미가 있는 책이다. 나도 이 책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연작을 모두 사놓게 됐다. 풍부한 레퍼런스와 자상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쉽게 구성하려고 노력한 점도 좋다. 저자의 이론이 좀 더 세밀하고 공교해지기를 기대한다.
'리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멈춰라 생각하라 (0) | 2015.01.20 |
---|---|
몰라봐주어 너무도 미안한 그 아름다움 (0) | 2014.10.09 |
빨간 리본 (0) | 2014.09.13 |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 (0) | 2014.09.09 |
선조 (0) | 2014.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