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다시 읽는 성경

창세기 17~18장

자카르타 2016. 5. 2. 08:33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가 되는 장면이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식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다시 등장한다. 그동안 사래의 존재가 간과되었던 측면이 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인데 적장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사라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장자를 가르는 기준은 뭐였을까? 정실에게서 난 자라야 한다? 


이름을 바꾸고, 할례를 받는 과정을 거쳐야 언약이 이뤄진다. 예언을 이루는 과정이 지난하다. 


앞서 사라가 이집트의 왕들에게 끌려갔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다. 여기서 보면 둘의 나이가 10살 차이가 나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 사라는 65세였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사람들이 혹할만큼 미모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65세 정도면 어느 정도 미모를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아브라함이 120세이 죽나? 만약 지금의 80세와 비슷하다고 한다면? 즉 3분의 2로 나이를 줄인다면 65세는 42세 정도가 되겠다. 그래도 앞의 기사는 불가사의다. 


언약의 징표로 왜 할례를 택했는지도 의문이다. 왜일까? 단서가 있기는 하다. 언약을 몸에 새긴다는 의미라고 했는데 문신도 있고 다른 방식도 있을 텐데 왜 굳이 성기에 표시를 하려고 했을까? 이 시대 중동의 관습과는 무관한 것이었을까?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라는 책을 봐야겠다.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흥정은 다시 읽어도 새롭다. 그는 왜 이런 무모한 흥정을 시도했을까? 성경의 기자는 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한 것일까? 

다른 사람의 의로움으로 공동체가 면죄된다는 것이 이 당시 보편의 정서가 아니었을까? 개인주의에 반하는 이 정서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개인의 죄를 친족이나 공동체에 전가하는 연좌제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개인의 선이 공동체의 죄를 덮어주는 경우는 왜 옹호해야 하는 거지? 이 불균형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그 관점이 바로 공동체의 비전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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