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다시 읽는 성경

창세기 19~21장

자카르타 2016. 5. 3. 08:24

19장.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가 무엇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동성애 반대론자들이 얘기하듯이, 소돔 남자들이 여호와 일행을 '상관하겠다'며 나선 일이 전부다. 후대의 기록에 다른 평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동성애를 두고 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쓴 당시의 사고방식의 반영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시대의 한계, 저자의 한계다.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 얘기 


롯은 정말 자신의 딸이 들어와 동침하는 것을 몰랐을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연 이틀을. 이것 역시 그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한 성경 기자의 폄훼의 시선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이후에 모압과 암몬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면서도 룻에게서 그 회복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은 훌륭한 플롯이다. 롯에게서 룻에게로. 



20장. 

아브라함이 또 게네브로 이동을 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영향을 준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이적을 경험하고, 비슷한 일을 경험했음에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구책을 더 의지한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믿음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다. 그런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다니! 그 타이틀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일을 기리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은 백이십세 정도가 되어야 비로서 자신의 믿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 숱한 이적을 경험하면서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믿음의 본질을 깨달아 알다니! 그게 인간인 것인가?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라가 아비멜렉이 연정을 품을 정도로 아리따웠다는 기록이다. 사라가 회춘을 한 것일까? 뭐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성경에는 사라가 회춘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사건이 기록된 뒤에 사라가 이삭을 낳았다는 얘기만 있다. 

하갈을 대하는 사라의 표독스러운 성정은 여기에서도 다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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