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잔뜩>
영화 시작에 소개되는 성경구절은 누가복음 36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는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도마로 소개한다. 이 때문에 그는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난 도마가 참 억울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러 성경을 보면 그는 한치의 의혹을 품으면서도 아는 척, 믿는 척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확신을 위한 회의랄까? 그런 그의 성향을 알기에 예수는 불신에 대한 격한 책망대신 도마에게 못 자국 난 손을 만져보라고 내밀었던 게 아닐지. 어쨌거나 도마가 예수의 찢어진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장면은 중세 화가들이 단골로 그렸던 주제 중 하나다. '의심에 대한 경고'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이 소재가 소비되는 경향은 다분히 '엽기 그로테스크 호러물'로서였다. 난 <곡성>이라는 영화도 비슷하다고 본다. '의심'이라는 화두를 묵직하게 던지는 것 같지만, 그냥 서스펜스 구축을 위한 소재에 그칠 뿐이다.
그 근거로 우선 이 영화가 드러내는 '의심'이 균일하지 않다. 가장 큰 뼈대를 이루는 이방인에 대한 '의심'은 도마의 경우처럼 '믿음'과 대립항을 이루지 않는다. 이 때의 '의심'은 오히려 '편견'의 대립항이다. 영화는 주인공이 이방인에게 두는 의심과 어쩌면 이것이 이방인에 대한 편견일 수 있다는 불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이런 갈등의 구조는 사실 흔하다. 영화 <프리즈너스>도 이런 류의 갈등을 다룬다. 딸이 유괴되자 아버지는 마을을 배회하던 자폐증 청년을 범인으로 의심한다. 발달장애에 대한 막연한 편견일까? 아니면 청년의 출현이 정말 실종과 인과관계가 있는 걸까? 이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다 주인공은 급기야 청년을 고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갈등은 정점을 찍는다. 초반에 설정한 주제를 충실하게 끌고가는 셈이다. <곡성>도 일본인을 죽이는 장면까지만 본다면 이런 플롯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프리즈너스>와 다른 점이 있다. <프리즈너스>가 '사실은 알고 보니 자폐증 청년도 아동 유괴의 피해자'였다는 제삼의 '타당한' 선택지를 반전의 결말로 내놓는 대신, <곡성>은 전혀 엉뚱한 다른 '의심'을 갈등의 소재로 꺼내놓는다.
하이라이트에서 영화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가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밑줄을 그으면서, 여기서 새로운 의심을 분화시킨다. 즉 다른 캐릭터 무명이 악령일지 모른다는 의심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앞서 일본인에 대한 의심처럼 무명이 낯선 존재이기에 가능한 의심이라는 점에서 동어반복이면서, 일본인과 달리 무명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판단 근거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면에서 서사의 퇴행이다. 이런 식이면 <곡성> 미니시리즈를 만들어도 되겠다. 무명이 악령인줄 알았더니 무당 일광이 악령이더라. 일광이 악령인줄 알았더니 처음에 등장했던 형사가 악령이더라. and so on. and so on. 그럼에도 감독은 주인공이 무명에 대해 의심하는 장면에 '세 번 닭이 울 때까지'라는 장치를 동원해 '믿음'의 문제임을 억지 주장한다. 엄밀히 따지면 베드로의 배반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두려움의 문제인데도 그렇다. 이 작품이 '의심'이라는 소재나 성경의 맥락을 활용하는 것이 이런 식이다. 바나나 대신 바나나향이 들어간 바나나 우유처럼. 그러면서도 영화의 마지막 신부와 일본인의 대면씬에서는 대놓고 이 '의심'을 또 꺼내든다. 처음에 제기했던 일본인에 대한 의심이 편견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결말도 우습지만, 관객이나 주인공 모두 그 사실을 확인했는데 거기에 서브 캐릭터를 동원해서 다시 '의심'과 '믿음'의 구도를 꺼내드는 건 도대체 무슨 치기일까.
물론 <곡성>이 의심이라는 주제에 깊이 다다르지 못하고 그저 서스펜스의 소재에 그친다는 것이 흠결이 되지는 않는다. 곡성 만이 아니라 그런 영화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오로지 의심 3종 세트로 치장한 영화가 의심과 그에 따른 불안을 직조하는 방식이 오로지 감독의 작위에 의존한다는 것은 큰 흠이다. 달리 얘기하면 이 영화에는 관객의 추리를 위한 배려들이 전혀 없다. 너무 노골적이라 그때 그때 다른 판단 수정을 강요하는 정보들이 난무할 뿐이다. 첫번째 의심 - 일본인에 대한 의심은 사진과 같은 객관적인 증거만이 아니라 주인공이 겪는 환상과 꿈이라는 주관적 증거까지 동원되면서 강조된다. 그러나 그 의심이 절정에 이르러 일본인을 죽이게 될 때, 벼랑 끝에 매달린 일본인의 애처로운 모습, 벼랑에서 떨어졌을 때 삐저나오는 신음 소리들은 오셀로 게임처럼 앞서의 판단을 간단히 뒤집는다. 가장 첨예한 긴장인 - 무명과 일본인 중 누가 악령일까를 두고 고민하는 순간 병원 TV에서 '버섯 유통설'이 흐를 때는 정말 작위도 작위도 어지간히 하지, 싶었다. 영화에서 중의의 구조를 만들어 관객이 정당하게 추리할 여지를 만드는 장면은 일광과 일본인이 굿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유일하다. 이 장면 때문에 이 영화의 유일한 반전이랄 수 있는 반전이 만들어진다. 일광과 일본인이 싸운게 아니라 서로 호응한 거였네! 그러나 이 영화는 갈등의 축을 산만하게 넓히면서 이 반전의 충격을 스스로 반감시킨다.
호불호가 갈리는 만큼, 장단점이 분명한 영화이기도 하다. 확실히 매 시퀀스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탁월하다. 그러나 의도된 모호함을 걷어 냈을 때 드러나는 빈약함들은 치명적이다. <곡성>이 나온다는 얘길 듣고 두어 달 전에 부랴부랴 <황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도무지 <추격자>의 단순한 서사에서 살이 붙지 않은 이 빈약함들이 <곡성>에서는 채워질까? 아무래도 그 빈약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 <추격자>류로 돌아가지 않을까 예측했었는데, 그 빈약함을 감추기 위해 이렇게 작위적으로 플롯을 꼬아놓다니! 그러면서도 어떤 서사의 진전도 만들지 못하다니. 염전 노예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주술을 쓰는 줄 알고 고문을 했더니 정말 주술사였더라. 재개발지에 혼자 사는 여성이 밤마다 남자를 꼬여 죽인다는 소문이 돌더니 정말이더라. 뭐 이런 식의 플롯에도 평론가들은 상찬을 늘어놓을지 의문이다. <곡성>은 아무래도 패착이다. 사실주의에 충실한 서프라이즈를 탁월하게 만들었다는 면에서 이 시나리오는 영화보다는 테마파크 '귀신의 집'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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