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세세한 율법을 내리다."
십계명의 부칙이랄까? 세세한 율례를 내린다. 도둑질에 대한 것이 많고,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배상 규칙들을 다루고 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도착하려면 먼 백성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들었을까? 구직자에게 직장에서는 이러저러해야한다고 설명하는 것과 비슷할까? 아마 이 율례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둑맞을 재산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흐뭇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고아와 과부에 대한 언급은 언제 들어도 따뜻한 기운을 전한다. 더불어 나그네에 대한 얘기도 그렇다. 너희도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하라. 채권자처럼 굴지 마라.
23장.
"너희는 나를 이렇게 섬기라."
22장에서 이어진다. 앞부분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설명한 뒤, 신앙 생활에 대한 얘기로 넘어간다. 7년째에는 밭을 그대로 두어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양식으로 삼으라고 한 얘기가 있다. 십일조보다 훨씬 진일보한 생각이다. 그저 돈을 나눠주라는 것이 아니라 산업을 꾸릴 수 있는 터를 주라는 말씀이니.
뒷부분 너희가 ....게 하면 나도 ...게 하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기독교 기복신앙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 아닐까 한다.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종교로 극복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회의도 든다. 지난 주 제정구 사진전에서 본 마지막 사진이 그렇다. 개미굴에서 사는 여인이 아기를 등에 업은 채 통곡하며 기도를 한다. 그 앞에는 그 여인의 아들로 보이는 코흘리개가 엄마의 낯선 모습을 입벌리고 바라보고 있다. 희망이 없는 개미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 그 기도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그 희망을 붙들 수 있게 만든 건 어려운 하나님 나라 개념이 아니라 이런 쉬운 말씀 한 구절이 아니었을까. 이런 신앙으로 그야말로 '생존'해온 사람들에게 기복신앙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약발이 먹혀들 수 있을 것인지.
24장.
"이스라엘의 장로들, 여호와를 만나다."
출애굽기를 보면, 그 이후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낯을 가린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아니 상당히 그런 인상이 짙다. 이스라엘 장로들 70인을 불러서 여호와와 회식을 하는 장면인데, 건들면 죽는 보안 장치를 해제하고 정성껏 준비한 만찬을 베출고... 이런 걸 보면 뭔가 친한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 같지는 않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더구나 이렇게 대면까지 했는데도 이후에 금송아지 신을 만들어 경배한 사건이 생긴 것을 보면 이때의 만남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어색함은 이유가 뭘까? 왜 갑자기 창세기부터 내려오던 신의 존재가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430년 동안 신은 어디 갔다가 나타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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