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데, 작품의 성패는 설정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 같다. 맥기 식으로 얘기하면 주제를 이룰 대립항을 만드는 것이 일의 절반이지 싶다. 간극이 뚜렷하게 벌어진 대립항을 제대로 설정해 놓으면 그 사이에 '그럼에도'를 집어넣는 일은 훨씬 수월할 테니 말이다.
기적이 믿기지 않는 것은 비과학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빈도의 차이다. 저기선 저리 흔하디 흔한 기적이 왜 여기에선 이리 드물기만 한지.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기적의 스펙타클을 현재에 재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 '낯선 기적'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였을 게다.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서 고를 수 있는 대립항은 많다. 영화 <엑소더스>의 출발은 '이성과 신앙'의 대립으로 시작한다. 전쟁을 앞두고 '지도자를 구한 사람이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는 신탁이 떨어진다. 모세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들은 알고 있다. 미래의 새로운 지도자는 모세를 말하며, 이 신탁이 이뤄지기 위해선 모세가 파라오를 구해내겠구나.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성을 버리고 신앙을 택하는 과정을 밟게 될까?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모호하다.
이성의 관점에서 신앙은 맹목이고 광기일 수 있다. 리들리 스콧은 시내산에서 벌어지는 신과 모세의 조우를 모세의 꿈이나 환영으로 처리하면서 이런 구도를 유지한다. 이건 <노아>가 취한 관점과도 비슷하다. 비가 내린다는 신탁을 받은 노아는 외롭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산 위에 방주를 짓는 그는 미친 노인네다. 그러나 <엑소더스>의 구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모세는 환영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돌아가지만, 메신저인 그를 방해하는 것은, 그를 미친놈 취급하는 타인의 오해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모세의 내면에서 비롯된다.
신의 의지에 대한 오해. 모세는 이집트에 돌아온 직후 자신의 기술-병법을 이용해 게릴라전을 펼친다. 그러나 신에 의해 제지당하고, 신이 재앙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때 모세는 뜬금없이 갈등하고 신에 저항한다. 처음엔 신의 방법이 적의 반발을 부른다고 뻗대더니, 이집트의 장자를 죽이려고 할 때는 너무 잔인하다며 신을 말린다. 하이라이트인 유월절을 지내면서 영화는 이전부터 간간히 문제를 제기했던 '야훼는 어떤 신인가'의 주제를 꺼내든다. 이때부터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예 <노아>처럼 광기로 오해되는 광신, 맹신하는 모세와 이에 대한 오해의 구도로 갔다면 어땠을까? 상황을 따져가며 분노를 터뜨리는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보다는, 사람들이 보기에 광기에 휘말린 모습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감독은 끝까지-홍해의 기적 이후에도 모세를 역사의 승자로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고뇌가 머물러야 할 주제로 '이성'을 택한 것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구약의 손꼽는 마초 모세에게 햄릿의 고뇌를 안기다니.
아, 마지막 부분 모세가 직접 돌판에 글을 새기는 건 코미디였다. 아이 신이 나왔던 것도 영 어색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