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한 가운데 죄인이 섰다. 둘러싼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다. 랍비가 옷을 떨구자, 그 신호에 따라 돌들은 얕은 포물선을 그리고 구덩이의 중심을 향해 빨려간다. 뼈와 살을 찧는 소리는, 벌써 군중들의 저주와 욕설에 묻혀버렸다.
랍비는 알고 있을까? 신이 죄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한 이유를. 그건 율법서의 기록처럼 회중에서 그를 끊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덩이를 에워싼 이들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란 것을. 누구도 죄인에게 연민을 품어서는 안 된다. 돌 던지기를 주저해서도 안 된다. 저주를 멈춰서도 안 된다. 이탈은 곧 죄인에 대한 동조였기에. 계속해야 한다. 죄인의 몸이 돌 더미에 사라지기까지. 나는 저 죄인과 다르다는 증명을.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예수는 알았다. 사람들이 집어든 것은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것을. 공동체를 오염시킨 죄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칫하면 그럴 수 있는 자신의 죄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하마르티아. 신이 정한 죄란 과녁에서 살짝 벗어난 실수까지 포함하기에.
예수의 시대에서 2천 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돌멩이를 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장식하는 흉악범들을 보면서. 한때의 방종과 태만이 초래할 파국을 경고하고, 무능이 증폭시킬 불확실성을 상기시키고, 아찔한 충동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되뇐다.
<종의 기원>, <28>을 거쳐 <7년의 밤>으로 왔다. 정유정의 작품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다. 처음에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글을 쓰느라 자료 조사 차원에서 읽었다. <덱스터>에 견줄까?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 풀어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래서 <28>을 읽었다. <7년의 밤> 역시 사이코패스가 나오지만, 오히려 글의 주제는 이후 작품에 비할 수 없다.
소녀를 목졸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한 마을을 수장시킨 흉악범. 모두가 돌팔매를 할 수 밖에 없는 그 흉악범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끌어낸다. 흉악범 현수나 나나 모두 제 운명의 굴레에서 멤도는 아니, 제 운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 아니냐. 다만 그는 좀 더 좁고 깊은 늪에 빠졌을 뿐.
<7년의 밤>에서 나 역시 고민하던 서사의 어떤 기능을 본다. 이해하지 못할 것에 대한 이해. ‘그럼에도’의 영역. 흑과 백의 점묘로 이뤄진 인생을 한 발 떨어져 응시했을 때 번져오는 회색의 착시. 하루키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를테면’의 연속이라고 했다지? 삶이 뭐냐는 질문에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를테면 ‘7년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