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자카르타 2017. 3. 12. 16:31




90년에 입학했을 때 등록금은 130만 원 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97년에 입학했을 때는 180만 원이었고. 스스로 도시 빈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88년 이후 가파른 경제성장 덕인지 우리 가계도 조금씩 허리를 펴는 중이었고, 아주 잠깐이지만 십일조 액수 순으로 적어주는 교회 주보에 어머니 이름은 상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90학번인 물리과 다닐 때는 어머니가 대부분 등록금을 대주셨다. 대신 생활비는 과외비로 충당했다. 아니, 매달 30만 원씩 받았던가? 기억이 불성실한 것을 보면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지 않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쪼들리지는 않았던 셈이다. 97학번으로 영화과를 다닐 때는 국립대학인 덕에 장학금을 많이 받았다. 한 절반 정도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한 번은 교회에서 내주셨고, 나머지는 어머니께 신세를 졌다. 하지만 매 학기 실습으로 만들어야 하는 단편영화 제작비는 꽤 부담이었다. 다섯 건 씩 과외를 해 얻은 수입의 대부분은 거기에 충당됐다. 궁한 생활이었지만 미래가 암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빚이 없었으니까. 

이 책 2장을 보면 학자금 대출은 90년도에도 있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돌아보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몇 번 망설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끝내 빚을 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요인이 뒤섞여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순전히 이 책 때문에. 

이 책은 지금 대학생 세대가 왜 빚을 질 수 밖에 없는지를 분석하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 세대가 왜 어지간해서는 빚을 지지 않고도 대학 생활을 치러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복지의 영역을 개인의 책임과 금융 상품으로 전가한 신자유주의와 IMF를 지내면서 가족 재생산의 거의 유일한 희망으로 대학이 자리잡게 된 '신학력주의'를 원인으로 꼽는다. 물론 이런 것을 방치, 방조, 이용한 정부의 책임도 묻는다. 

문제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문제와 관련된 이해관계자가 온전히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 등록금 대출은 복지의 외피를 쓰고 정부와 학생만 돌출되어 있다. 실제로는 금융 상품이고 채무자인 금융 회사, 채권자인 대학생 그리고 이를 방조하면서 비싼 등록금으로 편익을 보장받는 대학, 교육의 사회적 가치를 무시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교육 당국이 얽혀 있는 문제다. 이 허다한 이해관계자가 드러날 때 근원적인 질문이 힘을 가질 수 있다. 왜 교육의 책임과 부담은 오로지 학생이 져야만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친구가 떠올랐다. 교회도 열심히 다녔고, 성격도 밝고 유쾌한 친구였다. 꽤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1학년을 마치고 더 공부를 이어갈 수 없었다. 홀 서빙에 배달 일까지 낮밤으로 알바를 했지만. 언젠가는 무를 먹다가 앞니가 빠졌다며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지만, 그게 학비는 커녕 가족의 생계를 잇느라 혹사한 탓이란 걸 그 뒤 이십 년 이 지나서야 문득 알게 됐다. 

나름 도시빈민이었던 나는 운 좋게 그 친구의 삶의 경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칫하면 누구든 그 경로를 밟을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숨 죽이고 채무 불이행성을 따져보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친구에게, 요즘 청년들에게 미안하다. 

이 책 많이들 읽었으면 좋겠다. 워크숍 차 만났던 작가는 근래 만났던 50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 기업을 운영하던 그는 책모임에서 이 책을 읽고 회사에 가서 직원들에게 채무 상태를 물어봤다고 한다. 그제서야 자기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 채무를 지고, 갚고 있는지 알았다고 한다. 남 얘기 할 것도 없다. 나도 우리 동료가 빚을 갚고 있다는 걸 그때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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