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헤어진 전남편의 소설이 도착한다. 제목은 ‘야행성 동물.’ 전남편이 여자에게 붙인 별명이다. 여전히 불면에 시달리는 여자는 소설로 밤을 보낸다. 소설은 주인공이 괴한들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복수한다는 이야기다. 복수는 소심하다. 그리고 약해 빠졌다. 어쩌면 이렇게 전남편을 쏙 빼닮았을까? 여자는 점점 과거 속으로, 잔인하게 남자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을 무렵 여자는 전남편과 약속을 잡는다. 기다리는 남자는 오지 않고, 하염없이 기다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 복수 이야기일까? 19년 만에 전남편 에드우드는 걸작을 미끼로 던지고, 마침 결혼의 파국을 앞둔 수잔은 그 미끼를 덥석 문 것일까? 한껏 꾸미고 나갔지만 바람 맞은 수잔은, 그렇게 복수를 당한 것일까? 질문은 이어진다. 에드우드의 작품은 정말 걸작이었을까? 얼마 읽지도 않고 수잔은 메일을 쓴다. 문장이 너무 좋다… 였던가? 원작 소설은 모르겠지만 영화는 문장을 볼 수 없으니 패스. 다만 플롯을 보자면 영화 속 에드우드의 소설 이야기로 나오는 장면들이 그렇게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감상평 또한 수잔의 심리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에드우드와의 결혼에 질려갈 무렵, 수잔은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 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에드우드의 판박이다. 유약하고 소심하고. 어쩌면 그의 문장, 그의 글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이 말해주는 것은 그저 아직도 그가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극중 소설의 제목은 왜 하필 ‘야행성 동물’일까? 왜 불면을 본능으로 부르는 것일까? 이 영화를 복수극으로 보지 않고 다른 독해의 가능성을 여는 길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야행성 동물과는 달리 생기 잃은 불면의 밤. 지극히 동물적이지 않은 이유로 역설적이지만 지극히 동물적인 생태를 닮아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