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칸에서 기립박수란 그냥 덕담 수준의 예의라는 걸 잊지 말았어야 했다. <리얼>을 피했으니 다행이라고 안도하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이 허탈함,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짜증의 이유는 뭘까? 모든 영화에는 저마다 일말의 미덕은 갖고 있다는 평소 지론이 묵사발나는 것 같은 참담함은 왜 일까? 왜 심야 영화를 보고 걷는 오붓한 산책 길이 이리 답답해야하나?
아니다. 포기하지 말자. 아무리 CGV초대권으로 본 영화지만, 그래도 애써 시간을 들인 영화니 좋은 점을 생각해 보자. 분명 좋은 점이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있긴 하다. 우선, 멜로 영화와 액션 영화 두 가지를 같이 볼 수 있었다. 멜로 요소와 액션 요소가 있었던 게 아니라. 멜로 영화랑 액션 영화 두 개가 한 영화에 있었다. 그리고… 분명 2D였는데 3D보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리고…. 아, 힘들다.
만약에 옆집 남자가 국정원 직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감춰져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멜로 라인을 최대한 절제했더라면? 여자 비밀 요원들이 신분을 감출 수 있는 직업이 미용사, 배우, 요리사 말고 다른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여필종부 삼종 세트를 다 나열하지 말았다면 좀 덜 진부했을까? 아, 부질없다.
감독의 전작 <내가 살인범이다>가 일본 소설 <범인에게 고한다>와 비슷한 구조이긴 해도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껏 퇴행한 느낌이다. 이후에 또 잘빠진 액션 영화를 들고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자신 없는 멜로나 다른 요소들은 과감하게 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