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점점 등산을 닮는다. 매일 숨 가쁘게 읽지만 좀처럼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 올해도 역시 한 주에 한 권 읽기는 물 건너가는 걸까? 상반기 마지막 책은 <몸의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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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에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일기’라며 한껏 꾸미고 있지만 구라다. 분명 소설이지만 읽는 내내 작가는 정말 자신의 몸의 일기를 써놓고 참고한 것이 아닐까? 혹은 여러 세대, 여러 명의 일기를 모아 놓고 참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12살부터 87세까지의 신체의 변화를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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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일기’가 아닌 ‘몸의 일기’지만. 신기하게도 몸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아빠 없는 열두 살 사내 녀석이 고추를 까고 오줌 누는 법을 배우는 모습부터 중년이 되어 건강 염려증으로 공황을겪는 모습까지 한 인생의 파노라마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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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살았던 여든일곱에서 마흔이 모자란 나이를 산 독자는 절반쯤까지는 실험군, 대조군을 비교하듯이 본다. 웃기도 하고 불현 듯 옛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특히 주인공이 약한 몸을 단련하는 장면에서는 국민학교 때 정글짐, 구름다리, 철봉에 매달리던 기억이 났다. 타잔 같은 아이들을 피해 해 저문 뒤에 가곤 했던 운동장의 어스름한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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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때 주인공은 갑작스런 이명에 당황한다. 몸 일기 워크숍을 기획하고, 몸 도장을 만들어 일기를 쓰려고 하고, 갑자기 권투 도장을 끊은 나처럼. 이제 한 달이고, 도장 선배들에 비하면 내 주먹질은 권투보다는 태극권에 가깝다. 그래도 오바이트가 쏠릴 때면 쉰 살에는 신인왕전에 나갈지도 몰라, 속으로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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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인생의 몇 분의 몇을 잠으로 보낸다는 얘길 가끔 듣는다. 전 같진 않아서 요즘은 그 시간이 아깝다는 논조는 거의 없어진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몸이 느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인생의 절반은 그냥 무감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아닐까? 케익을 가로로 잘라 버린 것처럼 맛있는 부분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 맛있는 부분을 모아놓은 책. 귀엽고 맛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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