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혁명과 농업 혁명 그리고 과학 혁명으로 이어지는 호모 사피엔스의 대장정을 축약한다. 한 때 수십여 종에 달했던 호모 종 가운데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가 생태계의 정점에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를 제시한다. 워낙 양이 많은 데다 읽은지 한 달이 지나서 쓰는 리뷰라 기억이 가물한데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허구의 가치. 오직 사피엔스 종 만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서 인류의 통합에 기여한다는 얘기다. 가장 강력하게 기여한 것은 종교와 제국과 돈(금융)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 제국에 대한 평가는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세대들이 본다면 당혹스러울 만큼 관대하다. 호도한다기 보다는 사피엔스 종의 지속과 번영이라는 잣대로 본 것이라, 민족과 윤리의 문제와 구분해서 본다면 신선한 시각들이다.
농업 혁명에 대해서는 인류의 승리가 아니라 밀과 벼의 승리라는 관점이 인상 깊다. 농업 혁명이 인류에 기여한 것은 개체의 영양이 아니라, 계급의 분화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과학 혁명에 관해서는 과학이 경제 발전이나 정치 안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불과 산업 혁명 이후의 인식이라는 지적도 재밌다. 이 인식의 전환이 있게 된 것은 자본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는 지적도. 그리고 근대인의 특징이 지식의 분량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느냐 여부라는 통찰도 신선하다. 이런 관점은 왜 중국이 화약을 먼저 발명하고서도 한동안 폭죽 외에는 무기화 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세종대왕을 포함해 많은 발명가들이 우리 역사에 포진해 있음에도 축적되어 오지 않았는지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역사는 미래를 예측하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저자의 말처럼. 저자는 이 책을 미래에 대한 단언으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 다만 역사의 우연이 쌓이면서 사피엔스가 현재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 자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로 대신한다.
거대한 역사를 몇 가지의 열쇠말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 프레임에서 벗어난 다른 역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키지만, 수백 페이지를 가득 채운 촘촘한 사례와 논증은 그 어떤 드라마 보다도 흥미진진한 스펙터클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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