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남한산성

자카르타 2018. 7. 8. 22:30




알량한 ‘현장’이지만 나름 사람과 부대끼는 일이다보니 말이란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크다. 모두 제 말의 중심과 무게를 자신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말의 무게는 얼마나 가벼워지고, 그 중심은 또 얼마나 헛헛한가. 도무지 의지할 것이 못된다. 오로지 믿을 것은 그의 행동과 그 행동을 낳는 상황뿐. 


남한산성으로 쫓겨들어온 이들이 말로 그린 ‘살 길’이 천 갈래 만 갈래지만 천출 서날쇠는 입성하는 초군들의 짐짝을 보고 단박에 성의 운명을 알아 낸다. ‘저것들이 겉보리 한 섬 지니지 않았구나.’ 상황으로 보면 모든 것이 자명했다. 달포치 양식을 쪼개고 부상자들을 굶겨 보름치 식량을 늘린다 한들 끝은 달라지지 않았다. 


칸에게 산성은 자명한 만큼 이해못할 일이었다. 성채가 부실하기는 저들의 허탄한 말과 한가지였고, 싸우려는 것인지 지키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대륙을 가로지르기로는 말과 행동이 한 가지였던 칸은 조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짓는 말의 성의 효용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겠구나. 그래서 병판은 적의 추위로 내 군병의 언 몸을 덥히겠느냐? 병판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 임금은 병판의 말이 답답했고, 그 말에 의지해야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낮에 비가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라고 밖에는 쓸말이 없었던 사관도. 김훈은 ‘병자년의 치욕’을 운운하지 않는다. 그깟 절이야 뭐가 대수라고. 인조의 술을 받다 오줌발을 흩날리는 칸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작가는 ‘치욕’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한 말들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배신자 정명수가 정처를 잃어버린 것도 ‘말의 정처’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라고 김상헌은 읽은 적이 있었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그래 살아 있는 몸이 되자, 라고 다독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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