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의 마지막 8년을 담은 일기다. 지암 윤이후는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윤두서의 생부로 죽기 5일 전인 1699년 9월까지 8년간 일기를 후손들에게 남겼다.
그의 일기엔 방문한 사람들의 이름, 거래한 물건의 시세, 주고받은 선물의 내역, 바다를 메워 간척한 과정과 집을 짓고 묘를 쓴 과정들이 촘촘히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만 잡아서 연구해도 꽤 내실있는 연구가 되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이 일기의 내용을 주제별로 연구한 사이트가 있다. (지암일기 : 데이터베이스 http://jiamdiary.info/ )
12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일기를 읽다보면, 어떤 선입견을 걷어내고서 그때의 일상을 덤덤히 받아들이게 된다. 계급 사회, 왕정 시대, 비과학의 모순에 실소가 내뱉다가도 그게 시대의 한계였음을 감안하면 '그럼에도' 삶의 도리와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이 보인다.
흉년이 거듭되면서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에 대한 기록이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고신 끝에 죽어야했던 아들을 아파하는 모습들, 신분을 떠나 충실한 삶을 산 이들에 대한 존중이 곳곳에 담겨있다.
몇년 전에 수십 년 된 일기를 모두 버린 뒤에 일기 쓰는 일이 심드렁해졌다. 왜 써야 하는지, 뭘 쓸지도 모호한 가운데 쓰는 버릇만 남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하던 중인데. 이 책을 읽으니 의미는 꾸준함과 일관됨에서 나오는 것 같다.
몇년 뒤에 다시 한번 읽어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