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지적 사기

자카르타 2020. 8. 1. 00:03

 

꽤 늦게까지도 허영을 부렸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할 텐데 나이 먹어서 좋은 건 내 허영이 그다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 어느 정도 제어하는 중이다. 하지만 삼십 대에는 그런 걸 몰랐다. 영화 얘기를 하다보면 꼭 남이 보지 않은 영화 얘기를 꺼내야 직성이 풀렸고, 입문서만 읽은 사상가들을 주어삼켰다. 내 생각을 레퍼런스의 목록이 대신하던 시절이다. 그때 한 친구는 누군가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꺼내면 꼭 이 책 얘기로 종지부를 찍곤 했다. <지적 사기>

앨런 소칼이라는 물리학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지적 허영-주로 과학 이론을 사회과학에 접목시키면서 빚는 허세를 조목조목 비판한 책이다. 이 책을 내기에 앞서 저자는 <소셜 텍스트>라는 저널에 자신이 혐오하는 철학자들의 과학 이론 오용 사례를 레퍼런스로 언급한 엉터리 소논문을 제출한다. 저자는 저널 측이 논문의 엉터리 논지에 대해 지적해주기를 기다리지만 대신 논문은 특별호에 실리게 된다. 이후 저자는 자신의 논문이 짜깁기로 만든 가짜임을 밝히면서 사회 과학자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계열과 자연 과학자 사이에 큰 논란을 가져왔다.

이 소논문은 이 책 <지적 사기>의 뒷부분에 실려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은 이 가짜 논문에서 인용한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 보드리야르, 들뢰즈, 가타리 등 이다.

일단 통쾌하다. 맨날 주눅들게 했던 동네 형이 다른 동네 형한테 쳐발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들의 원저를 읽은 적이 없다는 점. 저자인 앨런 소칼이 이야기했지만 이런 과학의 오용을 비판했던 것이지 이들의 사상 전반에 대한 비판은 아닌 만큼, 여전히 건재한(?) 동네 형의 어록은 숙제로 남는다는 점이, 세상 의미없게 만든다.

신기한 건 아마 이 책을 읽지 않고 이들 원저에서 이런 부분들을 만났더라면 그저 그런줄 알고 읽었을 게다. 명색이 물리를 전공했으면서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위상학에서 언급된 것들을 보면서 '원래 이 동네는 이렇게 쓰나' 싶기도 했으니까.

앨런 소칼의 기고와 이 책으로 인해 한국에서도 꽤 이슈가 되었던 모양이다. 2000년대 초반 무렵에 벌써 휩쓸고 갔단다. 그 논쟁의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이런 허세가 남아있을까?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과학의 엄밀하고, 정교함, 단순 명료함을 부러워하는, 그래서 어설프게 '과학적' 시도를 하는 연구들은 종종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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