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자카르타 2020. 8. 9. 21:46

 

아침에 동물농장에서 새끼를 낳은 판다를 봤다. 난생 처음 낳은 새끼지만 거두고 품는 본능이 어김없다. '본능'이라 해서 폄하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종을 보존케 한 그 본능이야말로 생의 핵심을 간추린 것이 아닐지. 그 본능을 거스르는 문화야 말로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

 

'아버지'가 된다는 것도 그렇다. 본능에 따라 자신의 핏줄이 당기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아버지'란 이름이 품고 있나? '가족'은 또 어떠한가? 영화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외아들 케이타가 6살이 되었을 때, 아들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케이타로 불려야 할 아이는 지금 가난한 수리공의 아들로 류세이라 불리고 있다. 고민은 깊으나 정해진 결론이다. 두 집은 핏줄을 따라 아들을 맞바꾸기로 한다. 본능을 따라간 길의 끝은?

 

케이타가 틈틈히 자신을 찍은 사진을 보고, 남편은 케이타를 다시 만나러 가지만, 난 이미 그 앞 장면에서 이 영화가 할 이야기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혈육인 류세이에게 정이 든 아내가 케이타에게 미안하다며 우는 장면이. 그에 앞서 남편은 자신을 키워준 계모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했던 마음도 한가지일 게다. 그 미안함이, 본능 이상의 그 무엇이지 않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째다. <아무도 모른다>의 잔인한 결과를 보고 이 감독의 작품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무도 모른다>도 너무 힘들어서 보다가 만 것을 <나의, 아저씨>의 송새벽이 극중에 한 얘기를 듣고 마저 보게 되었다.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가물하다.

 

<아무도 모른다>는 꽤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썩은 감자물 아래 녹말이 고이듯 남는 것이 있다. 그것도 미안함이었을까? 남은 연말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다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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