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자카르타 2020. 8. 29. 21:58

 

강대국의 간섭과 그와 결탁한 사대주의 관료들의 방해. 간천의를 만든 장영실이 명나라로 압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종이 차악책으로 안여(임금의 연) 사고를 조작, 장영실에게 책임을 씌운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한글 창제 반대로 맞불을 놓아, 세종의 자충수가 된다. 장영실이나 한글 창제냐를 놓고 세종의 갈등이 깊어지자, 장영실은 스스로 희생한다.

 

줄거리로만 보면 치밀한 플롯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매 변곡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세종은 장영실을 구하기 위해서 안여 사건을 조작하면서, 단지 장영실의 실수를 넘어 역모 사건으로 키운다. 공신 세력들을 꺾기 위해서라고는 하는데, 정말 그들 중 누구라도 목을 벨 계산이었다면 과연 실행자인 장영실은 장 80대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지 않나?

 

또 사대부와의 일전까지 결심한 세종이 한글 창제 반대를 꺼내든 영상의 딜에 응한다? 아직도 허준호가 연기한 그 원로처럼 왕실의 친위대가 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장영실이 스스로 역모를 고백해서 중형을 자청한다고 해서, 관료들과의 딜이 무효로 되고 한글 창제를 마음대로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건가? 어차피 장영실 따위의 생사와는 상관없이 한글 창제는 사대부들의 극렬한 반대에 놓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을 정리하면, 우선 강하고 분명한 악역이 없다. 명 나라 사신은 비리를 까발리니 제풀에 물러나고, 세종과 빅딜에 나선 영상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오히려 세종이 살육을 벌이려 하자, 이를 만류하는 모습에선 진보하는 시대정신을 세종과 함께 나누고 있는 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도 선명하지 않다. 대사로야 지루할만큼 반복되고 있지만, 간의와 한글 창제에 깔려 있는 세종의 철학은 겨우 장영실 한 명에 대한 브로맨스로만 표현된다. 정말 빅딜의 대상인 한글 창제의 이유와 가치는 몇 마디 대사로 이어질 뿐이다.

가장 불만족스러운 것은 갈등을 일으키는 힘의 제원이 명확하지 않다. 세종을 가로막은 벽이 얼마나 두터운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조금 동떨어진 예이지만, 이런 엉성함은 선공감의 관리들이 고문받는 장면에서 압축된다. 이들이 고문받는 장면은 실제의 잔혹성에 비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희화된다.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을 이들은 전옥서에 들어오자마자 농담을 주고받으며, 심지어 무너진 천정을 직접 고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보이는 모든 갈등들이 어째 현실에서 발을 떼고 있는 것처럼 긴장감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작용과 반작용이 예상되지 않으니까.

 

미스터리라 할 정도로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장영실의 이야기와 한글 창제를 맞물린 것은 기발했으나, 장영실이 세종을 위해 희생했다는 상상을 위해 많은 것을 더 큰 미스터리로 남겨 놓은 영화다. 이렇게 문약, 병약한 세종은 그 뒤 어떻게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을까? 신권과 왕권의 갈등은 차라리 <나랏말싸미>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맞아 인생이란 이렇게 칼 대신 무수한 말로 벌이는 전쟁이잖아! 적어도 나랏말싸미는 공감의 지점이라도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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