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많은데, 그 중 절차탁마의 길로 떠밀어 주신 분은 단연 옛 직장 선배다. 어느 그룹 사내 방송 팀에서 일할 때였는데 편집과 촬영을 담당했던 이분은 일주일에 반나절 편집하고, 반나절 촬영하는 날을 빼고는 온종일 주식화면만 들여다보던 사람이다. 꼴에 선배라고 선배 대접 따지는 이여서 나하고는 사이가 꽤 틀어졌는데 이 분이 내 글을 그렇게 잘근잘근 씹었다. 내 글을 읽으면 온 몸에 뭐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다나.
지금 생각하면 아마 '지분거리는 글'이란 얘기였을 것 같다. 구구절절 문장도 길었던 터라, 방송을 녹음하러 온 성우들은 종종 '어휴 피디님 대단하시네요' 하며 웃었는데 그게 칭찬이 아니었던 거지. 그 이후에 여러 선생님들 글쓰기 수업을 들은 것도, 글쓰기 관련 책을 꾸준히 읽게 된 것도 다 그 선배 덕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인데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특히 글이 막히거나 여전히 '지분거리는' 글을 쓰고 있다 싶을 때는 더더욱. 그리고 수혈하는 기분으로 글쓰기 책을 찾아본다.
<짧게 잘 쓰는 법>은 내 식으로 말하면 지분거리지 않는 법이다. 저자는 독자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과감한 글쓰기를 강조한다. 개요를 통해 논지를 잡고 살을 채워나가는 글쓰기에 대해 격하게 반대하는 것도 흥미롭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글의 '리듬'을 강조하고 있는데 '파인딩 포레스트'에서 숀 코너리가 타자의 리듬을 느끼며 글을 쓰라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긴 편집 교과서 <In the blink of eye>에서도 편집의 여섯 가지 원리 중 당당히 세번째가 리듬이 아니었던가?
260페이지 중에서 190페이지까지가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잠언들이고 그 이후에 예시 문장을 놓고 저자의 평가가 이어진다. 잠언 부분은 명쾌하지 않아서 저자가 정확히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모호한 경우가 많았는데, 뒷부분 예제를 보면 이해가 간다. 영어 문장에 관한 이야기라 우리에겐 적용이 되지 않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다시 읽어봄직한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내겐 이오덕 선생의 글이나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가장 훌륭한 글쓰기 안내서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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