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앞부분에 어거스틴의 <고백록> 11장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오길래 이쪽으로 선회했다.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기대로, 현재는 집중으로 현존한다는 어거스틴의 시간에 대한 정의를 통해, 폴 리쾨르는 시간에서 역사와 서사로의 변화의 궤적을 추적하려고 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현재와 대비되는 과거와 미래가 '분산'이라고 표현한 것은 도무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정의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분산' '흩어짐'이란 표현을 10장 기억에 관한 진술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다른 경험들은 마음 속에서 이미지로 남아 기억을 하는 과정에서 다시 재생되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학문과 같은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으나 흩어져 있는 것들이 학습을 통해서 다시 재배열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이 '흩어짐'이란 단어를 구도자의 '집중'이라는 단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었던 셈이다. 즉, 미래에 대한 기대와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신의 현존에 집중하는 것. 그것을 갈망하고 있었던 셈이다. 꽤 오래전부터 나 역시 '집중'이 최대의 관심사였기에 어거스틴의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책 전체에 걸쳐 그의 회고록으로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 책에는 그밖에도 여러가지 얻는 것이 있다. 플라톤주의 철학에 입각한 세계관의 면면을 살필수도 있고,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원류를 발결할 수도 있다. 또 뜻밖에 요즘 기독교에서의 성서해석과 또 다른 해석의 태도들 - 특히 12장, 13장 창세기 해석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을 은유로 해석하는 태도 역시 뜻밖의 발견이다. 물론 여기에서 어거스틴이 말하는 '은유로서의 해석'은 엄밀하게 말하면 신이 창조의 과정에 은유를 심어놓았다는 뜻이지, 성경을 은유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런 고전을 읽다보면 매번 느끼는 거지만 1,600년이 훌쩍 넘은 옛날사람의 성정이나 생각이, 결코 오늘의 우리와 비교했을 때 고루하거나 뒤쳐져있지 않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