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다시 읽는 성경

출애급기 1~3장

자카르타 2016. 5. 26. 09:18





1장.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가 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간단히 얘기하면 잊혀진 거다. 요셉의 공로가. 

히브리인들을 억압하는 과정들도 흥미롭다. 감독을 세우고, 공동의 부역을 제시하다가 억압은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다. 

남아를 제한하기 위해서 산파들을 이용하다가 결국 영아 살해까지 명령하게 된다. 결국 권력이 막장까지 간 셈이다. 



2장.

"모세가 광야로 도망치다." 

나일강에서 모세를 구하는 장면은 익숙한데. 모세가 유모(자신의 생모)의 집에서 자랐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아마도 젖을 뗄 무렵까지였겠지만, 그저 '아기가 자라매'라고 되어 있어서 언제 유모의 곁을 떠났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그 다음절 히브리인들을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하는 걸 봐서는 히브리인이라는 자의식은 계속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민족의 개념이 근대 100년 전에 생긴 개념이라고 했는데 이때 모세가 갖고 있던 이 개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히브리가 노예를 지칭하는 단어라면 '같은 노예'라는 의식이었을까? 그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든 간에 유대인에게 이런 구절들은 일찌감치 민족 의식을 심어줬을 게 분명하다. 우리 역사도 서양 역사학의 논리를 떠나서 민족 의식이 언제 생겼을지를 고찰해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역사학자들의 일이겠지만, 그렇게 숱하게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는데 그 반대급부로 '우리'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거란과 구별되는 고려인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이번에도 우물에서 수작을 건다.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하게 되는 것도 여기였고, 야곱이 아내를 만나는 것도 우물이었다. 우리로 치면 물레방앗간과 같은 건가? 

아니면 여자들이 나다닐 수 있는 공간이 우물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여성의 외출을 심하게 제약하는 분위기는 모르겠다. 양떼를 몰고 남자 목동들 사이에서 물을 다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제약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여성과 만나는 장소는 어김없이 우물이 된다. 



3장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2장에서 모세의 아내 십보라의 아버지가 르우엘이었다가 3장에 오면 이드로로 불린다. 이상해서 검색해 봤더니 뒤에 가면 사사기에서는 호밥이라고 이름이 바뀐단다.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그저 성경이 여러 전승들이 뭉쳐서 이뤄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장이 성경 무오설이나, 영감에 의한 기록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썼다는 것이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의 장면이다. 

인간이 신을 향해 당신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을때. '나는 나다 I am who I am / ego eimi'라고 대답하는 신의 모습에서 성육화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예수의 전조를 본다. 교회 학생부 아이들과, 아니면 어른들이라도 이런 장면을 극으로 만들어서 드라마 예배를 드려도 좋겠다. 각자가 좋아하는 성경의 장면들을 나누고 토론을 해도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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