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분분한 것이 '기획'인 것 같다. 가끔 기획 강의도 하긴 하지만 어느 특정한 분야에 국한된 것을 너무 일반화하지는 않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내 스스로도 기획서를 작성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는 걸 보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무슨 '정석'이라고 하면 코웃음을 치면서 보지 않았는데, 지금 내가 가진 '기획'에 대한 정보를 점검해보자는 취지로 읽게 됐다.
역시나 '기획'에 대한 각각의 정의는 다양한 것 같다. 기획자의 수만큼 기획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저자가 얘기하는 기획은 주로 마케팅에 가깝다. 우리처럼 지역에 들어가 지역민과 어울릴 수 있는 프로세스와 문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처럼 콘텐츠 자체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클라이언트의 명확한 주문과 콘텐츠가 있고 이걸 효과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것. 이 책은 주로 이 분야에 집중한다.
기획을 설득의 프로세스로 정의하고, 왜, 뭘, 어떻게, 만약에 등으로 그 내용을 구성한다. 이 가운데서 가장 집중하는 것은 왜. 이 프레임을 공모사업 기획안에 적용할 수 있을까? 어떤 문제를 이미 알고 있고, 그 해결책을 요구하는 공모전에서? 심사위원들 앞에 문제 현황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자살골을 넣지 말라고 얘기하고 다니지만, 여기서도 곱씹어 볼 점은 있다. 같은 문제라도 집중할 초점이 다를 수 있으니. 진맥이 다르면 처방도 달라지겠지.
문제점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최선의 상태'와 '현 상태'를 대비한다는 것도, 이를 도식화한 사고를 강조한 것도 재밌다. 뻔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막상 기획서를 쓰다보면 내가 이 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곤 한다.
일종의 훅이라고 설명하는 '콘셉트'를 만들기 위한 설명은 너무 피상적이다. 그러고 보면 이 책 전반이 얇팍하다는 느낌이다. 비유한 연애담은 아슬아슬하고,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가장 큰 아쉬움은 문제점에서 솔루션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다. 혹은 브라운운동처럼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대중의 정서와 도킹하는 통찰을 얻어내는 것. 사실 기획자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책에서도 그런 감성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툴을 제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도구 상자에 가득찬 드라이버를 보는 기분. 강력한 보쉬 드릴은 없다.
앞으로 1, 2월은 기획에 관련된 책 몇 권을 더 보고 내 나름 기획에 대한 정리를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