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만들어지는 지점에서 신화를 깨뜨린다.
'유린된 여성이 악착 같이 복수를 수행한다'는 설정은 익숙하다. 강간이든 가족의 피살이든 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여성의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그만큼의 혹독한 수련 또는 희생을 거치면서 복수의 대상에게 무자비한 앙갚음한다. 이 과정에서 폭력은 이쪽 저쪽 가릴 것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한쪽에서는 관음증을 충족시키고 다른 쪽에서는 대등하지 않은 대결에서 오는 긴장과 공포, 신체 훼손의 쾌감과 그로테스크까지 감각의 향연을 펼친다.
이 영화는 이런 관습들을 차례로 거부한다. 우선 주인공이나 다른 여성이 강간을 당하는 장면에서는 고집스럽게 여성의 얼굴 클로즈업을 쓰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고통을 대면하게 한다. 주인공의 첫번째 복수가 이뤄지는 장면 - 소위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도 이런 방식은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어느 쪽의 폭력이든 그 폭력에 희생되는 이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앵글의 각도를 기웃거리는 나, 엿보기를 즐기는 나와 대면하게 만든다.
다른 복수극에 비하면 여주의 복수도 지리멸렬하다. 남자의 머리를 으스러뜨려 첫번째 복수를 완성한 뒤 여주는 죽은 이의 원귀에 시달린다. 궁극의 복수의 대상인 중위를 만났을 때는 제대로 총 한 방을 쏘지 못하고 줄행랑을 친다.
여주는 장교 술집에서 중위의 죄과를 폭로하고 자신을 위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한다. 여성 영웅에 대한 기대를 무색케하고, 폭력에 대한 내성을 만든 신화를 거부한다. 영화가 영국 식민 시기로 배경을 삼으면서도 그런 전설과 신화를 거부했던 것.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결국 중위를 죽이는 것은 여주의 길안내를 맡았던 흑인 원주민이다. 복수의 대상을 좇는 과정에서 백인인 여주와 흑인인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백인의 노예로 살던 흑인 원주민이 군인 살해에 가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각성이 아닐까 한다. 보호구역 울타리 밖에서 과거 동족을 잃었던 아픔과 현재의 폭력을 체감하면서 자신의 처지와 정체성을 다시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애써 잊고 있던 복수를 실행할 수 있었으리라.
여주가 흑인 원주민의 비참에 얼마나 공감하고 동참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여주가 원주민에게 많은 빚을 졌다. 여주가 물에 빠졌을 때 원주민이 목숨을 구해줬고, 첫 살인으로 괴로워할 때 치유의 의식을 베푼 것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을 때 길을 알려준 것도, 복수를 대신해준 것도 원주민이다. 반면 원주민의 고통은 늘 세계에 충만해 있다. 여주에 가해진 폭력이 최소한 은폐될 필요가 있었던 데 비해, 흑인 원주민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자랑거리가 된다.
그렇다고 바닥 인생끼리 연대해서 서로의 복수를 완성해준다는 서사인 것도 아니다. 둘의 연대는 밀림에서 길을 찾는 정도, 그리고 마지막 밤 손을 맞잡고 온기를 나누는 정도. 각각의 각성과 각각의 복수로 영웅 서사를 버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폭력에 대한 당대의 시선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