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557

연필 깎기의 정석

바빠서일까? 요즘은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일인데, 마음이 심란할 때면 이면지를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 동안은 이면지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게 사는 건가? 남들이 흔히 하는 게 이면지 정리 아니냐 하겠지만, 모르는 말씀이다. 생각 외로 이면지 정리를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이면지를 구출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면지들은 대부분 복사기 옆에 A4지 박스에 쳐박혀 있기 십상인데, 이들을 집어들어 간추리는 순간부터가 갈등의 시작이다. 이면지라는 것이 나름 용도폐기된 존재들이고 보니, 오랫동안 그들의 존중받아야 할 '자원'으로서의 가치는 철저히 무시당하기 마련이었다. 찢어진 종이, 뜯겨진 종이, 씹힌 종이(이 세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면 당신은 아직 이면지를 정리할 준비가 ..

리뷰/책 2020.06.08

자동화된 불평등

차라리 AI 법관을 만들면 지금보다는 훨씬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최근 성범죄 형량이 낮은 거, 여전히 유전무죄인 상황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 을 읽고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책의 사례에 따르자면 (아마 그렇게 되기 십상일 텐데) AI가 판례를 참고한다고 해도 기존 불의한 판례를 참고하기 때문에 이를 답습하기 쉽다. 판례가 아니라 법문을 참고한다고 해도 애초에 불평등하거나 사회 정의를 고려하지 않은 법이 개선되지 않는 이상 판결은 개선될 여지가 없다. 가령 기업 살인법이 신설되고 벌이 강화되지 않으면 여전히 이촌 물류창고 화재 사건과 같은 재난의 책임을 온전히 물을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간단한 사실인데 '프로그램'이 처리한다는 사실이, 혁신 기술을 도입한다는 사..

리뷰/책 2020.06.01

지암일기

17세기의 마지막 8년을 담은 일기다. 지암 윤이후는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윤두서의 생부로 죽기 5일 전인 1699년 9월까지 8년간 일기를 후손들에게 남겼다. 그의 일기엔 방문한 사람들의 이름, 거래한 물건의 시세, 주고받은 선물의 내역, 바다를 메워 간척한 과정과 집을 짓고 묘를 쓴 과정들이 촘촘히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만 잡아서 연구해도 꽤 내실있는 연구가 되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이 일기의 내용을 주제별로 연구한 사이트가 있다. (지암일기 : 데이터베이스 http://jiamdiary.info/ ) 12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일기를 읽다보면, 어떤 선입견을 걷어내고서 그때의 일상을 덤덤히 받아들이게 된다. 계급 사회, 왕정 시대, 비과학의 모순에 실소가 내뱉다가도 그게 시대의 ..

리뷰/책 2020.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