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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와 베라

세상에 없는 셈 치자고 했던 감독들이 몇 있다. 국내에서는 김기덕, 홍상수가 그랬고 외국에는 라스 폰 트리에가 그랬는데 라는 영화를 보고 이 감독 테일러 뭐시기도 명단에 올렸더랬다. 무슨 종교를 핑계삼지만 밑도 끝도 없는 가학의 가학을 위한 영화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제목으로 인 이 영화도 테일러 뭐시기의 인장을 그대로 품고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능지처참이라고 알고 있는, 말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건 정확히는 '거열'이다. '능지'라고 하는 건 능욕을 지연시키는 것. 즉, 에서 언뜻 보였던 것처럼 죽지 않을 만큼만 살을 저미는 행위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우리네 망나니처럼 이 '능지'의 전문가가 있어서 죽기전에 살점을 천 조각이나 떼어낸 기록도 있다고 한다. 충분히 '능지'를 행한 ..

리뷰/영화 2020.10.03

화염조선

(아래는 2020.09.06. 리뷰) 12년에 처음 읽고 쓴 리뷰에는 몇 가지 불만들이 적혀 있다. 1. 국뽕이 세다. 2. 옛날 고문헌의 도해를 그대로 넣은 것은 텍스트 부연 설명으로는 정확히 어떤 구조와 원리인지 알 수가 없다. 3. 레퍼런스를 적지 않아 더 자료를 찾아볼 수가 없다. 4. 과학기술 측면에서 고증되지 않아 그 성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다시 읽어보니 국뽕은 그다지... 내 오독인 것 같다. 거북선 철갑설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고, 중국의 영향이나 일본의 영향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비거(하늘을 나는 수레)처럼 전설일 확률이 높은 것은 문헌에 나온 대로만 설명하고 있어 오히려 다른 설명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다시 읽어도 우리 화기 체계가..

리뷰/책 2020.09.06

천문 - 하늘에 묻는다

강대국의 간섭과 그와 결탁한 사대주의 관료들의 방해. 간천의를 만든 장영실이 명나라로 압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종이 차악책으로 안여(임금의 연) 사고를 조작, 장영실에게 책임을 씌운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한글 창제 반대로 맞불을 놓아, 세종의 자충수가 된다. 장영실이나 한글 창제냐를 놓고 세종의 갈등이 깊어지자, 장영실은 스스로 희생한다. 줄거리로만 보면 치밀한 플롯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매 변곡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세종은 장영실을 구하기 위해서 안여 사건을 조작하면서, 단지 장영실의 실수를 넘어 역모 사건으로 키운다. 공신 세력들을 꺾기 위해서라고는 하는데, 정말 그들 중 누구라도 목을 벨 계산이었다면 과연 실행자인 장영실은 장 80대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지 않나? 또 사대부와의 ..

리뷰/영화 2020.08.29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침에 동물농장에서 새끼를 낳은 판다를 봤다. 난생 처음 낳은 새끼지만 거두고 품는 본능이 어김없다. '본능'이라 해서 폄하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종을 보존케 한 그 본능이야말로 생의 핵심을 간추린 것이 아닐지. 그 본능을 거스르는 문화야 말로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 '아버지'가 된다는 것도 그렇다. 본능에 따라 자신의 핏줄이 당기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아버지'란 이름이 품고 있나? '가족'은 또 어떠한가? 영화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외아들 케이타가 6살이 되었을 때, 아들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케이타로 불려야 할 아이는 지금 가난한 수리공의 아들로 류세이라 불리고 있다. 고민은 깊으나 정해진 결론이다. 두 집은 핏줄을 따라 아들을 맞바꾸기로 한다. 본능을 따라간..

리뷰/영화 2020.08.09

아픔이 길이 되려면

마빈 해리스가 종교나 규례까지도 물적 토대 아래 두려고 했지만, 난 종교의 '계시와 계명'이야 말로 자본의 셈법을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아직도 기대를 접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자구에 얽매여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일삼는 모습을 보거나, 태극기 부대 행렬에서 십자가를 발견하면 차라리 과학의 합리와 논리가 종교를 대신했으면 싶다. 가난한 자, 이방인, 병든자, 재난을 당한 자, 해고당한 자, 성소수자, 성전환자 등 당연히 사회가 살피고 돌봐야 하는 일의 당위마저도 흔들리자, 사회역학자의 세심한 연구가 종교의 계명을 대신한다. 김승섭의 연구와 글은 인간의 온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차분한 과학의 논증을 이어나간다. 사회는 왜 가난한 자의 아픔에 책임이 있는지를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리뷰/책 2020.08.09

지적 사기

꽤 늦게까지도 허영을 부렸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할 텐데 나이 먹어서 좋은 건 내 허영이 그다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 어느 정도 제어하는 중이다. 하지만 삼십 대에는 그런 걸 몰랐다. 영화 얘기를 하다보면 꼭 남이 보지 않은 영화 얘기를 꺼내야 직성이 풀렸고, 입문서만 읽은 사상가들을 주어삼켰다. 내 생각을 레퍼런스의 목록이 대신하던 시절이다. 그때 한 친구는 누군가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꺼내면 꼭 이 책 얘기로 종지부를 찍곤 했다. 앨런 소칼이라는 물리학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지적 허영-주로 과학 이론을 사회과학에 접목시키면서 빚는 허세를 조목조목 비판한 책이다. 이 책을 내기에 앞서 저자는 라는 저널에 자신이 혐오하는 철학자들의 과학 이론 오용 사례를 레퍼런스로 언급한 엉터리 소..

리뷰/책 2020.08.01

절망의 구

커다란 신의 손이 구름 사이로 나와 계시를 써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바람이겠다. 하지만 이미 예수가 지적했듯이, 숱한 선지자를 보냈어도 그들을 돌로 쳐 죽인 게 인간이다. 아마 구름사이에 손이 나오는 것 이상의 신비와 숭고가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은 과히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가 바라보는 인간상은 그렇다. 어느날 지름 2미터의 구가 도시에 나타난다. 접촉한 자들은 모두 삼킨다. 구는 스스로 분열해 증식하고 오래지 않아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을 삼킨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최후의 사람'에서 소멸의 정점을 찍은 구는 핵이 융합하듯이 합쳐지고 마지막 하나마져 사라지자 구가 삼킨 사람들이 다시 나타난다. 사라졌을 때 모습 그대로. 여기까지라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와 매우 비..

리뷰/책 2020.07.31

단단한 삶

3주 전인가? 공모사업 심사를 마친 날 몸살을 앓았다.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 아래 앉은탓에 냉방병에 걸린 것일 텐데, 몸이 아프니 덩달아 마음도 성치 않았다. 그 전주엔 평소 젠틀하던 주민이 주차 지원에 선정되지 않은 문제로 소통방을 뒤집어 엎고 간 일이 명치에 걸린 듯 영 내려가지 않더니, 몸살이 온 김에 도졌나 보다.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주말 내내 집에서 앓으면서 공모에 떨어진 주민들이 항의할 일, 주차장 지원 관련해 협의할 일을 생각하니 심장이 떨려와, 이런 게 공황인가 싶었다. 주말 사이 몸을 추스린 뒤에 마음에 내린 처방은 '일상 되찾기'였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일상을 흩어버리지 않기. 그 일환으로 틈틈이 들고 다니며 읽은 책이다. 작가는 '자립은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리뷰/책 2020.07.28

The One Page Proposal

우리 직원들에게 추천한 책인데, 실은 나도 읽은지 꽤 된 터라 다시 읽었다. 몇 권,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펼쳐보게 되는 책이 있는데 성경이 그렇고, 이오덕 선생의 책들, 로버트 맥기의 스토리,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그러고 보니 주로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네. 어떤 책은 자신을 다독이는 글을 이야기하고, 또 어떤 이는 대중의 말글살이가 하나임을 얘기하고, 이 책은 돈이 되는 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글을 쓸 때 읽는 이를 배려하는 혹은 상대의 관점에서 글을 쓰라는 태도는 비슷한 것 같다. 이번에 읽었을 때는 좀 식상했다. 당장 우리네 기획서 풍토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상당한 부분도 있고, 그간 기획서를 계속 써오면서 느낀 갈증은 또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 같다. 기획..

리뷰/책 2020.06.21